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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김신중(시인)

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42] 늦가을의 풍경

2022. 11. 10 by 영주시민신문

가을이 오면 맨 먼저 생각나는 시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끝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간은 어느덧 우리를 가을 끄트머리로 떠나게 한다. 들판은 점점 비워져 가고 무성했던 숲은 잎이 떨어지면서 하나, 둘 뼈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은 소멸의 계절이어서 계절의 근골들이 점점 드러난다. 나이가 들면 살과 근육이 점점 줄어들고 뼈의 울퉁불퉁함이 옷 밖으로 드러나듯이 가을이 꼭 그렇다. 김현승 시인의 시처럼 가을에는 기도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 자체가 앙상하게 뼈만 드러나서 소멸의 적막함을 이기기가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굽이치는 바다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낸다. 백합의 골짜기와 같이 찬란하고 행복한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마른 나뭇가지 끝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푸른 잎은커녕 마른 잎도 없다. 나뭇가지도 말라버려서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의 어느 구석진 곳과 같다. 그 끝에 까마귀 한 마리처럼 우리는 위태롭고 고독하게 앉아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늘을 맞이하며 단독자로 서 있는 것이다.

김현승 시인은 이것을 절대고독이라고 노래한다.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마른 나뭇가지 끝에 있는 까마귀에게는 오직 하늘만 있을 뿐이다. 더는 언어도 필요 없고, 말도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덧없다. 오직 영원으로만 연결돼 있을 뿐이다.

2019년 가을에 있었던 이어령 선생과의 인터뷰가『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으로 출간되었다. “죽음이란 게 거창한 거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는 그만 놀고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가을에 된서리가 내리면 우거진 숲이 점점 뼈를 드러내게 되면서 사람들은 소멸을 생각한다. 가을이 되면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담담한 인터뷰 명언들을 떠올려 본다. 선생은 가을에서 봄을 보신 분이다.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어김없이 봄은 오는 것이기에 죽음 앞에서 생명을 말하면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어머니 품이라고 생각했기에 선생은 항암 치료도 받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힘 있게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어머니께 엽서를 보냈다. “어머니, 가을입니다. 세상 가득히 가을과 함께 낙엽이 떨어지고, 쌀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진, 허기진 가을입니다.” 편지를 부친 후 며칠 만에 이런 편지를 받았다. “야아야, 보아라. 온 마실을 돌아치며 이집 저집을 댕겼으나 오천 원밖에 못 빌렸으니 쪼개쪼개 쓰거라.” 오래된 40년 전 얘기다. 우리들의 가을 속에는 누구든지 멋스럽지는 않지만, 모래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찡한 가을 풍경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순흥에서 부석사로 향하는 은행나무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소백산의 그 곱던 단풍도 이제 막바지 치장을 하면서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에서 영원을 봤고, 이어령 선생은 죽음에서 생명을 보았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 너머에 있는 삶을 보았다. 오세영 시인은 가까이 있어 봄이고 함께 있어 여름인데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쯤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저만치 홀로 있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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