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44] 겸암(謙菴) 할배 공부터, 감동골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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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44] 겸암(謙菴) 할배 공부터, 감동골

2022. 10. 28 by 영주시민신문
겸암 할배 공부터
겸암 할배 공부터

봉화군 춘양면 도심 1리 감동골 사람들은 한국의 십승지 열 군데 중 두 번째 승지에 속하는 ‘화산’이 자기네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비결서에는 전국 제2승지를 「화산 소령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으로 넘어 들어갔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지점을 밝히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어느 곳인지를 확실히 가려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몇몇 마을에서는 서로 자기네 마을이 승지라고 주장한다.

소천면 현동리 도호마을 사람들은 바위에 쓰인 「소라동천」, 「소라고지」라는 암각이 그 증거라며 도호가 한국의 제2승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축지변 때 순흥안씨가 대거 흘러들어온 춘양 석현리 미찌골을 승지로 찍기도 한다. 춘양면 애당리 석문동 사람들은 차돌배기로 올라가는 석문(石門)이 바로 승지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춘양면 서벽리 사람들은 산으로 둘러싸인 형국에 물을 갖추고 들이 펼쳐진 산골 마을 골마를 승지로 잡는다. 근래에 세운 십승지 표석이 그 인증표란다.

하지만, 춘양면 도심리의 감동골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능한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일가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실을 들어 자기 마을 감동골이 확실한 승지라고 주장한다. 경암 류운룡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형이다. 그리고 실제로 겸암 류운룡이 여든 고령의 노모와 100여 명이 넘는 가솔(家率)들을 이곳 도심리 감동골에 피신시킨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번에 걸친 가족 대이동이었다.

전란이 끝나고 그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때 류운룡이 살았다는 움막 터는 아직도 마을 뒤 언덕 밭 가운데를 굳건히 지키고 앉아 마을을 굽어살핀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을에서는 이 석단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치성을 드린다.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올려 효험을 보기도 한단다. 풍산류씨 후손이 이를 관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겸암 할배 공부터」라고 불러오는 곳이다.

류운룡은 주로 이곳에서 역학을 공부하면서 구국의 일념으로 치성을 올렸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식량증산 독려에 시달린 토지 주인이 석단을 헐어 밭으로 일구었더니, 마른하늘에 뇌성벽력이 일고 마을에 때아닌 괴질이 넘쳐나 놀란 마을 사람들이 서둘러 석단을 복원하고 치성을 올려 괴질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후 마을에서는 더욱 영험한 석단이라고 신성시하는 곳이다.

그리고 겸암이 직접 심었다는 감나무도 풍산류씨 후손의 집 뒤란에 남아 있어 사람들은 이곳을 ‘감나무 모태(모퉁이)’라고 부르는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말엽에는 동생 류성룡까지 감동골에 들어와 기거하며 징비록(국보132호) 집필을 시작한 인연도 묻어있다.

감동골은 문수산 동편 산록으로 해발고도가 높아 연중기온이 선선하고, 1,000m가 넘는 문수산, 옥석산이 방패막이처럼 둘러쳐져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분지 가운데로는 맑은 운곡천이 흐른다.

이리하여 거친 산악이 외부를 차단해 주고, 안으로는 수량이 풍부한 개울이 흐르며 산골로서는 보기 드문 농토가 펼쳐져 수백 명의 식량을 공급해 주는 피난처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승지라고 고집할 수 있는 조건을 고루 갖추어준 셈이 되었다. 최근 인근에 국립백두대간수목원까지 설립되면서 그들의 어깨에 힘을 더 얹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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