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끓여 먹자. 커피 두 잔만 타 오지. 오늘 내린 커피는 향이 좋네.” 커피가 먹고 싶거나 마실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커피는 ‘끓이다, 타다, 내리다’ 같은 동사를 넣어서 말한다. 끓이는 것은 물에 커피 가루를 넣어 끓여서 추출하는 것이다. 타는 것은 물에 커피 가루를 넣어서 젖는 것을 말한다. 내리는 것은 물이 커피 가루를 통과하면서 커피를 우려내는 것을 말하며 핸드 드립이라고도 한다.
“커피를 디자인하다.” 요즘 종종 듣는 말 중에 하나다. 검색해 보니 카페명으로 쓰는 곳도 꽤 있다. 커피를 타고 끓인다는 말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잘 살린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생각해 보니 커피는 마시기보다는 즐긴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배가 고플 때 먹는 것도 아니고 목이 말라서 마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죽을 것 같아서 공급해 주는 영양분은 더더욱 아니다. 항암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암을 예방하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커피를 디자인하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물이나 커피를 조절하여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이 좋아하는 맛을 내는 것도 커피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카페라떼처럼 커피 위에 하트 모양의 무늬를 예쁘게 그리는 것도 커피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커피를 통해서 따듯한 인간관계를 그려가는 것도 디자인이며, 커피 향을 맡으면서 멋진 자기 자신을 상상하는 것 또한 커피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커피를 디자인하다’는 말속에는 미학이 숨어 있다. 미학은 모든 사람이 여러 감각을 통해 사물이나 경험을 인지하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커피를 디자인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카페라떼의 예쁜 무늬가 눈에 선하다. 진한 커피 향기 때문에 과감하게 이성을 버리고 감성적인 사람이 된다.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져서 분명하게는 말할 수 없는 야릇하고 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 오감(五感)을 느끼는 미학이 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물건에 대한 분석적인 사고보다는 느낌 때문에 산다고 한다. 물건을 찾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선택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물건을 살 때도 나름의 미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폴린 브라운은 「사고 싶게 만드는 것들」에서 미적 지능을 특정 사물이나 경험을 일으키는 느낌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표현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커피의 미학은 끓인 커피만 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으로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랜드에는 그 상품만의 상징이 있다. 코코 샤넬의 “우아함은 거절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샤넬만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한 상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로 되는 일도 아니다. 먼저 끊임없이 미적 탐구를 해야 하며 소비자들이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상징체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미적 관념을 품고 있는 상징이 있어야 한다. 사물이나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기호화 또는 상징화라고 한다.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주거나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부모의 소망이 이름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이 첫째 상징이라면 이제는 자기 자신의 소망이 담긴 삶을 상징하는 자신의 미학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단지 그렇게 만들어가는 상징은 추하면 안 되고 아름다워야 한다. 사람들이 오감으로 느낄 수 있으면 더더욱 좋다.
“커피를 디자인하다.”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상징이 있다. 지금까지는 누가 타거나 내려서 주면 먹을 뿐이라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커피를 마시며 직접 자기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멋진 삶을 이미지로 그려 보는 멋이 있다. 지금까지는 커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조연으로 연기를 했지만 디자인하는 순간 우리는 주연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제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삶을 디자인하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