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다.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경상도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는데 낙동강 왼쪽에는 퇴계 이황이 있고 오른쪽에는 남명 조식(南冥 曹植)이 있다는 말이다.
두 분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서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이 되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선비정신운동실천본부 주관 남명 유적지 워크숍으로 용암서원, 뇌룡정(雷龍亭), 산천재(山天齋), 남명기념관, 덕천서원, 세심정(洗心亭)을 둘러보았다.
세심정 옆에 남명의 시 「욕천(浴川)」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온몸에 쌓인 사십 년의 허물들/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벼슬을 마다하고 산림에서 처사(處士)로 남아 있는 것을 평생의 뜻으로 여기고 살아간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작은 티끌이라도 용납할 수 없어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깨끗함을 지키겠다는 선비의 뇌성이 들린다.
용암서원 앞에는 뇌룡정이 있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에 보이는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란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선생은 이 정자의 이름처럼 산림에 묻혀 있다가 세상을 향해서 우레처럼 소리를 질렀다. 조정을 농단한 문정왕후를 궁중의 과부라 칭하며 정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는 읽어볼수록 몸이 떨린다.
선생은 늘 방울과 칼을 몸에 차고 다녔다. 성성자(惺惺子)라 불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깨어 살아갈 것을 늘 경계하였다. 경의검(敬義劍)에는 “안을 밝히는 것은 경건함이요, 밖을 결단하는 것은 올바름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문구를 새겨 놓고 학문과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는 지식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방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몸에 찬 칼을 어루만지며 실천을 다짐한 선생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당시 시골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명 선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선생을 일컬어 ‘우뚝 선 천길 절벽과 같다.’ 하거나 ‘가을의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같다.’ 했다. 남명 선생의 유적지를 다니는 내내 따라붙어 다니던 선비의 강렬함이 아직도 떠나지를 않는다.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천재의 작은 오두막과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선생이 흠모했던 천왕봉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것은 선생의 이런 성품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초기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경상우도였으며, 의병장 중에 곽재우, 정인홍 등 50여 명이 남명의 제자였다. 학문은 세상을 조감하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는 일이며 실천이 뒤따라야 함을 강조하는 남명 선생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선생의 제자들은 몸소 “안을 밝히는 것은 경건함이요, 밖을 결단하는 것은 올바름이다.”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칼을 차고 다닌 선비였기에 제자들이 분연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선비의 고장’을 검색하면 영주에 대한 기사나 사진이 가장 많다. 영주의 브랜드로 내세웠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이미지를 디자인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면 검색량으로만 본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디자인했던 선비 도시 영주는 나름 독특한 이미지를 잘 구축해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화는 이미지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지 안에 영주만의 독특한 내용이 함축돼 있어야 완성품이 된다.
남명 선생의 방울 소리가 뼈를 때린다. 직선적이고 강렬하며 깊이 있는 수많은 언어가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하다. 색깔이 분명해서 꽉 찬 느낌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남명의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선비의 고장 영주를 되돌아본다.
영주 선비만의 색깔은 분명하게 있는지, 브랜드에 비해 선비에 대한 개념의 공허함은 없는지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색깔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념이 흐려지고 공허함이 찾아올 때는 색깔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남명의 방울 소리가 뼈를 때린 첫째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