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온 나라에 장독(瘴毒, 덥고 습한 땅에서 생기는 毒氣)이 낀 샘이 많아서 풍토병이 많이 발생하는데, 인삼을 물통에 넣어두면 탁한 장독이 가신다. 그러므로 인삼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겨 먼 지역에 사는 왜인들이 모두 대마도에서 인삼을 구매한다. 조정에서 해마다 공급량을 정해두고 사적인 거래를 엄격히 금하지만, 목을 베는 형벌을 내려도 거래를 막지 못한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날이 갈수록 인삼값이 뛰고 품귀현상이 일어난다.」
『택리지(擇里志)』에 기술된 ‘인삼의 효능과 거래’에 대한 내용이다. 『택리지』는 ‘터를 잡고 살 만한 땅’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인삼을 섭취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인삼은 일찍이 ‘만병통치’의 영약(靈藥)으로 알려져 왔으며, ‘불로장생’의 닉네임까지 붙어 다니는 신령스러운 약초다. 그러나 인삼은 영약인 만큼 자연환경에 민감하여 아무 데서나 재배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삼 생육의 최적지는 한반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삼의 독특한 영약 성분인 사포닌(saponin) 함량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런고로 조선 인삼(고려 인삼)은 일본, 중국에서도 명약(名藥)이자 영약으로 취급되어 특급 대우를 받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당나라에 인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당나라의 『해약본초』에는 ‘인삼은 신라국에서 산출되는데 손과 다리 모양’이라고 형태까지 기록돼 있다. 이런 귀한 약재이다 보니 『경국대전』에는 ‘인삼을 감춰간 자는 국경 상에서 목을 베어라’는 엄격한 법적 조치가 기록되어있고, 일본과의 대마도 교역에서도 ‘밀매 시 적발되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높이 매다는 형벌)한다’는 경고가 적혀 있을 만큼 통제가 살벌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 등을 바닷속 삼신산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데, 불로초를 ‘산삼(인삼)’으로, 바닷속을 ‘바다 건너’로, 삼신산을 ‘금강산(봉래산), 소백산(방장산), 한라산(영주산)’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일본인은 병에 걸렸을 때, 조선 인삼을 구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당시 부산 왜관(倭館)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은 인삼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거나, 자상(刺傷) 등을 입었을 경우 인삼을 씹어 바른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가난한 효녀가 병든 부모를 위해 조선 인삼을 구하려고 몸을 팔았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택리지』의 지적처럼, 일본에서의 인삼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개성 상인이 대마도를 매개로 일본에 인삼판매를 개척했고, 그들은 그 대가로 막대한 은화를 받아 챙겼다. 조선에서는 인삼공급이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급등했고, 일본은 막대한 양의 은화가 국외로 반출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상인은 물론 역관들까지 밀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발각되면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이익이 커서 밀무역은 근절되지 않았다. 1719년에는 통신사(通信使)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역관이 대마도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짐꾸러미 속에 인삼 12근이 들어 있었던 데다 일본인과 밀무역 정황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인삼 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개성 상인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인삼을 매점하여 일본 상인에게 넘겨주고 그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그들은 일본 은을 북경으로 가져가 다시 비단·생사를 구매하여 일본 상인에게 되파는 방식을 썼다. 인삼 수입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화가 국외로 유출되자 일본 막부는 ‘인삼 국산화 프로젝트’를 시행한다. 18세기 전반 마침내 국산화에 성공하지만, 기술의 빈곤과 기후․토질 등이 부적합하고 자금회전이 빠르지 못해 크게 성행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생근을 수입하여 땅에 묻어 두었다가 대마도 산이라고 하여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는 숨은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