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계, 하면 왜 이렇게 막연해지는 걸까? 소백산도 떡 버텨서 그 자태가 뚜렷하고, 계곡 물소리는 더욱 선명하여 우리의 귀를 울리면서 무엇 하나 흐릿한 것이 없는데 막상 죽계를 떠올리면 즐거움과 함께 막연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 그럴까. 답은 죽계의 깊고 깊은 데 있었다.
죽계에는 자연이 있고, 삶이 있고, 문학이 있고, 역사가 있다. 죽계에는 살아 숨 쉬는 인문학이 흐른다. 우리나라 어느 계곡도 따라올 수 없는 깊은 인문학이 있기에 자연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많은 계곡에는 구곡 (九曲) 문화가 조성돼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시작된 구곡 문화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와서 이황의 도산십이곡이나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같은 구곡 문화를 낳게 된다. 죽계에도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아홉 개의 곡석(曲石)을 정하여 죽계구곡을 정하였다.
퇴계나 율곡처럼 한 성리학자가 구곡가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한시들은 있다. 그러나 다른 구곡 문화와는 달리 죽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더하여 문학과 역사, 학문이 어우러져서 더욱 돋보인다.
죽계와 관련된 인물들을 나열해 보면 한국의 인명사전을 보는 것 같아서 놀랍다. 의상, 안향, 안축, 주세붕, 이황, 서거정 등 더한 설명이 필요 없는 분들의 이름이 줄줄이 열거된다. 이에 더하여 단종, 금성대군, 피끝으로 이어지는 죽계의 흐름은 역사의 무게도 가볍지 않다. 이에 소수서원에서 공부했던 4,300명의 유생을 더하게 되면 죽계에서 흐르고 있는 인문학은 어디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의상은 초암을 짓고 죽계에 살면서 정토를 꿈꾸었다. 안향은 죽계에서 성장하면서 한 시대의 획을 그을 상상을 하였다. 안축은 ‘죽계별곡’에서 순흥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노래했다. 퇴계는 “초목에는 우주의 이치가 깃들어 있고/ 죽계는 끝없는 소리를 머금어 고요하네.”라고 노래하면서 죽계에서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갔다.
서거정은 시에서 죽계를 천지자연이 만든 비밀이라고 했다. 죽계에서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우주와 자연의 조화와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했던 4,300명 유생의 삶을 상상해 본다. 그분들은 400년 동안 죽계의 인문학을 지켜 왔다. 그들 중에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도 있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소수서원 교적부에만 남아 있는 분들도 있다.
그들은 죽계에서 손발을 씻으면서, 갓끈을 씻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학문을 논하면서, 사는 얘기를 하면서, 과거에 급제할 소식을 기다리면서, 출사를 꿈꾸면서, 진리에 감탄하고 좌절하면서 죽계에 그들의 땀과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사람 사는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죽계에는 모든 인문학이 망라돼 있다. 지금도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를 죽계는 천 년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면 죽계에 가서 물소리를 듣거나 물의 흐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죽계를 거울로 삼아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쉽사리 우리들의 복잡한 삶의 문제를 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죽계에 발을 담근다. 자연은 어떻게 이렇게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지나갔건만 죽계의 물은 그냥 그대로 흐르고 있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흐르고 죽계에는 물이 흐른다. 우리의 역사가 인문학의 역사였다면 죽계의 흐름은 자연의 인문학이다.
죽계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으로 아픈 머리를 식히려고 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죽계에서 삶의 의미를 터득하고 돌아간다. 죽계는 인문학을 강의하지 않고 인문학을 물에 풀어 놓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