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없다’는 말이 있다. 터무니는 ‘터를 잡은 자취’를 의미한다. 집이나 건물을 세웠던 터를 보면 주춧돌을 놓았던 자리나 기둥을 세웠던 자리에 흔적이 남게 되는데 이게 바로 터무니다. 주춧돌이나 기둥은 집터의 중심이다. 그러니 ‘터무니가 없다’는 말은 주춧돌이나 기둥의 흔적이 없어졌다는 말이고 터에 무늬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터무니없다’는 말은 터에 흔적이 없어졌으니 ‘허황하여 전혀 근거가 없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좋은 건축은 땅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땅이 가진 원래 무늬에 현재의 무늬를 더해 새로운 ‘터무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승효상 건축가의 말이다. 강경록 기자는 이 말을 자세하게 풀이했다. 땅은 각각 무늬를 가지고 있다. 그게 터무니다. 터무니는 땅에 새겨진 일종의 기록이자, 나이테. 땅의 상태와 시간 그리고 자연과 사람 등 무수한 이야기가 이 터무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며 건축가는 땅이 품은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이 원하는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마을을 뜻하는 한자 이(里)가 있다. 흙(土) 위에 밭(田)이 있는 구조로 이루어진 글자다. 원래 흙은 무늬나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글자 그대로 흙인 것이다. 밭은 그렇지 않다. 먼저 사람들이 흙 위에 소유의 구역을 정하고 밭의 생김새에 따라서 무엇을 심을 것인가에 따라 밭을 갈고 골을 타고 모양을 만들어 간다. 승효상의 말로 하면 농부의 의도에 따라 밭의 무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밭을 만드는 일을 결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따라서 마을이란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늬나 결에 따라 만들어 놓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문화(culture)는 ‘경작하다, 밭을 갈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cultra’에서 온 말이다. 자연 상태로 있는 땅을 쟁기로 갈아서 밭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밭 모양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어원으로 볼 때 문화는 자연에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서는 문화를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이라고 했다.
우리말 ‘터무니’나 동양의 한자 마을(里), 서양의 문화(culture)를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식에는 무엇보다도 자기만의 무늬나 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에서는 무엇보다도 무늬나 결이 중요하다. 마을 문화에서는 그 마을만의 독특한 무늬와 결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도시문화는 도시 문화대로 독특한 무늬와 결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터를 잡고 무늬를 만들어 가되 터무니없는 문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원들은 보여준다.
영주가 문화도시를 지향함에 있어 ‘터무니’와 마을(里), 문화(culture)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화도시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의 터 위에서 우리만의 무늬가 만들어지고 땅을 갈아서 밭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거기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는 그 다음의 문제다. 다행히 영주는 밭이 잘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역이 따라올 수 없는 문화의 하드웨어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위에 우리 시대의 무늬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문화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은 유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영주의 문화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문화도시라고 하면 영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의 무늬나 결을 만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무늬는 꼭 전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통도 계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다양한 무늬가 나오듯이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되고 영주만의 무늬와 결이 살아 숨 쉬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문화도시로 가는 바람직한 길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