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아니, 많이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세대에도 이 말은 흔히 있었다.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 ‘어느 필경사와 말썽꾸러기 아들’로 불리는 글이 있다. 요약하면 “제발 철 좀 들어라, 내가 너에게 땔감을 잘라 오게 했느냐, 쟁기질을 시켰느냐,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제발 너의 형을 본받고 동생을 본받아라.” 하는 내용이다. 우리도 자라면서 많이 들었던 말이다.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젊은 사람들은 문제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젊은 세대에 대한 한탄이 나온다. “요즈음 세대를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학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자기 몸 다스림을 잘 아는 자가 적고, 사서오경을 공부하는 학문을 버리고 이익을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선조들이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래 뜻을 알겠는가?”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걱정과 공부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이익을 좇아가는 삶의 양태를 걱정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참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 사회로 범위를 넓히지 않더라도 우리 곁에는 이런 말이 난무하고 있다. 윗세대는 아랫세대에게 거침없이 이 말을 하고 있다. 70년대생은 요즘 젊은 청년들을 보고 철이 없다거나 답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대학생들은 고등학생에게, 고등학생은 중학생에게, 중학생은 초등학생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대들이 초중고 학생들을 급식층이라 지칭하면서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다고 말하는 현실이고 보면 누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게 ‘요즘 젊은 것들은’의 현실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에 대해서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많다. 우리 시대에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인신공격적인 말이 되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서 말한 사람이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잘못 말하게 되면 아동 학대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을 ‘것’이라고 해서 물건 취급했으니 학대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말이 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성숙했으니 마구잡이식으로 이런 말을 쓰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무엇보다도 젊은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옛날이야 사오십 대만 해도 “어른요, 어르신요” 했으니 어른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이야 사오십이면 젊은 축에 속하는 나이 대니 마냥 젊은 사람들이 어쩌고 하면서 책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연세가 든 어른들도 매양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에 의해서 씨줄과 날줄이 이리저리 짜 맞춰져서 옷감처럼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니 어느 한 세대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 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사람에 가까울수록 되어가는 존재에 더 가깝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기 집에 데려가 침대보다 작을 경우에는 나그네의 몸을 잡아당겨 죽이고, 침대보다 더 큰 경우에는 머리나 다리를 잘라 죽였다. 되어 가는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나그네 몸집에 따라 침대 길이를 조절한다. 윗세대에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유연성을 가지고 편견 없이 젊은 사람들을 보려고 노력한다.
시대는 변했다. 어르신들도 변하고 젊은이들의 생각은 더 변했다. 동서고금의 예를 들면서 경계하기에는 변화의 폭이 너무 커서 상황에 적절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화두로 던질 것인가?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다. 되어 가는 존재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필수 덕목이다.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성급하게 요즘 젊은 것들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오래 참고 기다리는 윗세대의 덕목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