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史劇)을 보고 있노라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이온데…”,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하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종묘․사직’은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여기에서 나오는 사직은 바로 「사직단(社稷壇)」을 말한다. 종묘(宗廟)가 역대 왕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면,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이를테면, 종묘제례(宗廟祭禮)가 왕실의 조상신께 드리는 제례라고 한다면, 「사직단」의 사직제(社稷祭)는 하늘 신께 올리는 제사인 바 조선의 국가 제례 중 가장 격이 높은 제례로 숭상되어왔다. 나라에 특별한 사정이 생겨 종묘 제사를 생략하는 상황에서도, 「사직단」의 사직제는 기필코 결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직’은 국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용어가 되었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기치를 내세운 조선 왕조답게 ‘사직제’는 조상 숭배 그 이상의 권위로 신봉되었다. 그러니만큼 사직제를 올리는 「사직단」은 국가의 정신적 근간과 정통성을 이어가는 매우 중요한 시설로 받들어졌다.
「사직단」의 역사는 삼국시대에서 출발한다. 문헌 『삼국사기』와 『문헌비고』에서 「사직단」의 존재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사직단」은 개국 시기에 맞춰 한양 경복궁 서쪽에 세웠다. 서쪽을 중시한다는 이서위상(以西爲上) 정서의 반영이다.
종묘는 왕실 가까운 한양에만 설치한 데 비해, 「사직단」은 한양뿐만 아니라 지방행정 단위인 340여 군현(郡縣)마다 모두 설치되었다. 도성에서는 임금이 직접 사직제를 봉행하지만, 지방 군현에서는 각기 고을마다 수령이 사직제를 올리게 되어있다.
우리 지방 순흥부(順興府), 영천군(榮川郡), 풍기군(豐基郡), 봉성현(鳳城縣)에도 각각 「사직단」이 설치되어 있어 지방행정 수령에 의해 사직제가 봉행 되어 왔고, 또한 이곳이 성역(聖域)으로 관리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곳을 주민들에게 돌려준다는 허울로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당연히 성역의 격이 유지될 리 없었다.
심지어 청소년 탈선의 장이 되기까지 했다. 이는 조선의 전통과 국격을 깔아뭉개기 위한 정책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통증은 광복 후에도 치유되지 못하고, 경제 논리에 밀리면서 부지가 축소되거나 다른 시설물이 들어서는 등 「사직단」은 아예 그 형태가 사그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잊혀진 곳이 되었다.
서울 사직동의 사직단, 광주의 사직공원 등도 그런 유래를 안고 있고, 문화재 구역으로 보호되어야 할 영주의 구성공원이나 풍기의 공원산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놀이공원이 되어버렸다.
<영주사직단>은 1908년 통감부의 칙령으로 제사에 관한 시설 대부분이 철폐되었다. 『영천(榮川)읍지』에 사직단은 관아(현 영주초) 서측 3리라고 적혀져 있다. 현재까지는 숫골(일명 사직골) 안쪽에 있는 대승사 부근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사 결과 영주시 영주동 115(社)번지로 밝혀진다. 영광여고 동남쪽 경계 지점으로 추정되는데, 그 형태를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순흥사직단>은 순흥부(현 봉서루) 서 2리에 있다고 『순흥읍지』에 적혀있다. 순흥면 석교리 592(社) 부근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지적도의 ‘사(社)’ 표시는 사직단을 말한다고 하는데, 현재 지적도상에는 종교 부지를 나타내는 종(宗)이라고 적혀있다. 1954년 항공지도에는 아주 작게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풍기사직단>은 제운루가 있었던 공원산 보평대(保平坮)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풍기읍성(현 풍기초)의 서편이다. <봉화사직단>은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고건축물 목록에 나타난다. 봉성면 봉성리 544-1(전) 73평이다. 관리자는 봉화군수로 되어있다. 조선시대 때 봉성현(현 봉성면사무소)의 서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