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영주 가로수에 이팝나무 꽃이 피었다가 진다. 벚꽃과 개나리를 시작으로 영주 여기저기에 영산홍과 철쭉이 핀 후에는 아카시아 꽃과 이팝나무 꽃이 하얗게 피어 영주를 뒤덮는다. 영주의 시목은 은행나무이며, 시화는 철쭉이라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연유는 잘 모르겠으나 바라볼수록 정감이 가는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하얀 꽃이 나무를 뒤덮은 5월의 이팝나무 꽃을 보고 있으면 고향 생각이 나기도 하고 하얀 얼굴이 까맣게 탄 엄마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세보의 농부가에 함포고복이란 단어가 나온다. “우순풍조(雨順風調) 아니런들 함포고복(含哺鼓腹) 어이하리. 비가 때를 맞추어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불지 않으면 어떻게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릴 수 있었겠는가?”
함포고복은 농부만이 아니라 우리 민중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었던 옛날에는 배부르게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살아보는 것이 으뜸 소망이기도 했다. 먹을 것이 흔한 요즘 세상이야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고 다이어트를 걱정해야 하는 세태이다 보니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전설이 되고 말았다.
옛날에 이팝나무를 심은 것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고 싶은 소원을 담은 것이라 한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벼슬을 해야만 비로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고 한다.
꽃이 피는 시기가 대체로 음력 24절기 중 입하(立夏) 전후이므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나무’로 불리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설도 있고, 하얀 꽃이 나무를 덮고 있는 모습이 밥주발 위로 봉긋이 올라온 쌀밥 모양이어서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설은 조금씩 다르나 흰쌀밥인 이밥을 먹고 싶은 민중들의 소망이 담긴 공통점이 있다.
지금 연세가 좀 든 어르신 중에는 이밥에 대한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흰쌀밥을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수확한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음력 4, 5월의 춘궁기를 가리켜 보릿고개라고 하는 데 이밥은커녕 보리밥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때니 이밥에 대한 서민들의 그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푸석푸석한 쌀인 통일벼가 나올 때까지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 이밥을 먹어 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산문시를 쓴 일이 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 매형을 따라 강릉을 갔습니다. 점심을 먹는데 소고기 국에 하얀 쌀밥이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공기 밥을 먹는데다가 그렇게 먹고 싶던 하얀 쌀밥이라 세 숟가락을 뜨니 밥공기가 비었습니다. 마침 그 집에는 내 나이 또래의 예쁜 여자애가 있어서 밥을 더 먹으면 나를 우습게 볼까봐 눈물을 머금고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더 먹으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앉아 있으려니 그 애랑 식구들은 두 공기, 세 공기씩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밖으로 나와 빵을 사서 덥석 무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이 시처럼 대부분 이밥에 대한 기억은 처참하다. 없어서 먹지 못한 사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참하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 영주시내에 가로수로 이팝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이런 처참하지만 아름다운 과거가 있었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에서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으나 이밥으로 대표되는 어려웠던 과거를 과거로만 묶어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자산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살았던 400년 노예의 삶을 잊지 않기 위해서 무교절이 되면 쓴 나물과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조상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되돌아본다. 우리도 이팝나무 꽃을 보면서 이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어려웠던 과거로 생각을 되돌려 보고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다져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