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순흥향교 추계 석전대제 의식을 본 적이 있다. 석전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인과 선현들의 학덕을 기리는 유교 제례 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별로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의식의 절차는 생소했지만 참여하는 분들의 엄숙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드리는 분들의 지극 정성을 보면 형식을 뛰어넘어 경외감마저 들 정도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참여하는 분들의 존함을 정성스럽게 일일이 붓글씨로 쓴다든지 제례를 드리는 손짓이나 얼굴 모습이 진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영화 ‘역린’에 보면 중용 23장의 감동적인 구절이 나온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배어나고, 배어나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게 되면 생육 된다.”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면서 변화를 가져오려면 무엇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정성스러움과 비슷한 말 중에 성실함이 있다. 성실은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뜻이다. 맹자는 “성실이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하게 행동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지극히 성실하면 움직이지 않은 자 없고, 성실하지 않으면 능히 움직일 수 있는 자 없다.” 했다. 성실하게 행동하려고 생각하고 정성스럽게 어떤 일에 매진하면 사람이나 사물을 움직여서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성이나 성실은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보면 되겠다.
어떤 국가든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있다. 우리도 2015년부터 미래시대를 예측하면서 미래 인재가 가져야 할 역량으로 자기관리, 지식정보처리, 창의적 사고, 심미적 감성, 협력적 소통, 공동체 역량을 제시하면서 하위 요소를 제시하였다. 미래사회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올 텐데 이러한 역량을 가진 인재를 양성해야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핵심역량과 하위 요소에 우리나라 전통교육에서 중시하던 성실성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교실 급훈에서 많이 보았던 성실이 미래 인재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나무꾼 두 사람이 나무를 하고 있다. 비탈진 산을 다니면서 어찌나 열심히 나무를 하는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열심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쌓은 나뭇짐이 점점 차이가 난다. 이상한 것은 종일 죽어라 일한 사람보다 중간 중간에 쉬면서 일한 사람의 나뭇더미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나무꾼에게 물었다. “쉬면서도 어떻게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었느냐?” 나무꾼이 대답했다. “나는 쉬면서 도끼를 갈았습니다.”
유튜브 채널 ‘스터디코드’에서 성실함을 반쪽짜리라고 하면서 성실성을 전략적 성실성과 우직한 성실성으로 나누고 있다. 전략적 성실성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 방법과 방향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나무꾼에서 도끼를 갈았던 나무꾼은 전략적 성실성을 가진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우직한 성실성을 가진 사람이다. 공부할 때도 그렇고 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직하게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이 방향은 맞는지, 내가 하는 방법은 옳은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성찰이 필요하다.
요즘 뜨는 말 중에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있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발견, 통제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자신에게 푹 빠져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나갈 일이 아니라 가끔은 자신이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하고 있는 방향은 옳은지, 내가 하는 공부 방법은 옳은지를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라는 말이다. 이처럼 정성이나 성실함도 마찬가지다. 맹목적이고 우직한 정성과 성실함은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자유로움에서 오는 창조적인 생각을 막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