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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시인)

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3] 선비에게 돈을 빌려주다

2022. 04. 08 by 영주시민신문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바느질품을 파는 아내 덕분에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간다. 무슨 일이든지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한양에서 제일 부자인 변씨에게 돈을 빌리러 간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보니 허생은 거지의 모습이었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겉모습으로야 돈을 빌리기는커녕 쫓겨날 수도 있는 행색이었다.

그런데 만 냥을 꾸어 달라는 허생의 말을 듣고 변씨는 두말없이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자본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상인 변씨의 태도를 가족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변씨는 돈을 꾸어주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변씨는 허생이 교언영색(巧言令色)하지 않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여 돈을 꾸어준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묘한 말을 하고 꾸미는 얼굴을 한 사람 가운데 인(仁)한 사람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교언영색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공자는 제자 중에서 안회를 가장 좋아했다. 안회를 칭찬하면서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안회를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변씨에게는 공자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서 있는 것이다.

선비에게는 이런 딜레마가 있다. 우선 선비는 안분지족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으면서 의로운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렇게 선비의 모습을 확장해 나가면 선공후사(先公後私)에 닿게 된다. 문제는 조선 후기를 살았던 허생은 안분지족하여 돈을 빌릴 수 있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허생처럼 살면 돈을 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냉혹함에 대해서 선비의 품성으로 접근해야 하니 이만저만한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에 선비 운운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허생은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딜레마를 던진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영주는 선비사상이라는 걸출한 브렌드를 가지고 있다. 회헌에서 삼봉을 지나 퇴계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큰 산맥이 영주를 둘러싸고 있으니 선비의 고장으로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주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문제는 안분지족을 강조하면서 돈을 빌리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안분지족도 좋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자본이란 따뜻함보다는 냉혹한 속성을 더 가지고 있기에 현실에서 따뜻함을 구현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선비의 고장 영주는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의 선비사상만 운운하다보면 현재에서 역동적으로 재해석 되는 역동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미래로 이어지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이상적인 선비상만 해도 그렇다. 이상적인 것만을 강조하다 보면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면서 미래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하며, 이상적인 선비상과 더불어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선비의 덕목을 개념화 시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비사상이 우리 몸에 배어 육화(肉化)돼야 한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자랑스러운 전통이 되려면 영주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사람됨으로까지 자리매김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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