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25] 상상을 초월하는 기생 초월의 상소문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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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25] 상상을 초월하는 기생 초월의 상소문

2022. 02. 11 by 영주시민신문

조선 헌종 때 한 기생이 국왕에게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었다. 초월이라는 평양기생이 쓴 상소문이었다. 조선 기생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신분도 신분이지만, 당시 초월의 나이는 열다섯밖에 안되는 앳된 여자아이였다. 그런데도 한문으로 작성된 문장이 무려 20,000자를 넘기는 장편소설 급이며, 사회 모든 부조리를 망라하여 언급한 조목만 총 180개 조항이나 되어 그 충격 또한 매머드급이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열다섯 살 어린 기생이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소문이었다. 게다가 구성이나 묘사가 뛰어나고, 문체가 진솔하며 그 전개 또한 거침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희대의 문제작으로 분류되어있는 상소문이다.

상소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상소를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곧 도끼를 옆에 놓고 상소를 올린다는 것인데, 소위 간을 배밖에 빼놓고 올리는 상소라는 말이 된다.

“평양기생 김초월(金初月), 나이 열다섯, 병오년(1846)에 상소하나이다.”로 일단 틀을 갖추고, “신(臣)의 운명이 기구하여, 어머니 뱃속에 밴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죽고, 낳은 지 한 해 만에 또 어머니마저 잃은 천애 고아의 천한 몸이라 관청 기생으로 달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고 나열할 때까지는 팔자타령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좋은 얼굴을 한 큰 도적이 조정에 가득해 국사를 어지럽히니, 신하는 강도가 되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어 나라가 도탄에 빠졌다”며 조정 세태를 한탄하고, “3정승 6판서로부터 ‘내삼천(중앙 내직 3천 명)’ ‘외팔백(외직 수령 방백이 8백 명)’ 관리가 직임(職任)을 사고파는 상사치가 되니, 탐관오리가 백성의 기름을 빨고, 좌수(座首), 아전이 나라 곡식을 훔쳐 먹는 세상이므로, 문무백관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문무 제신들의 행각을 실명으로 낱낱이 밝힌다.”면서 고관들의 부패상을 조목조목 명시하기 시작했다.

‘좋은 얼굴을 한 대도(大盜)’인 벼슬아치의 부패상, 권세가의 살찌는 곳간, 끝을 모르는 매관매직의 실타래, 갓난아이에게까지 물리는 병역세 등 방방곡곡 상하 비위를 모두 섭렵하고는 “각 고을이 강도요, 고을 원은 화적이온데, 전하께서는 마냥 너그럽기만 하시니….”로 중간 매듭을 짓는가 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왕궁으로 화살을 돌렸다.

“전하께서는 죄 없는 홍 중전(中殿)을 까닭 없이 홀대하니…”로 궁중 내의 중전의 위치를 호위하는 듯하다가 급기야 임금에게 직사포를 쏴대기 시작했다.

“임금의 자리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눈이 게슴츠레하고 옷고름을 매지 못할 만큼 몸을 가누지 못한다”며 주색에 빠진 임금을 질타하더니, “전하가 치맛자락을 잡고 선 평양기생 윤희는 만고의 요물입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꼭 요망한 계집이 생긴다 했는데… 지금이 그 짝입니다.” “임금이 창녀 치맛자락을 잡다니요? 또한, 그 계집은 신하를 따르던 계집이니, 전하께서는 신하와 동서가 되려고 하십니까?”로 흡사 격앙된 상왕의 꾸지람처럼 국왕을 추상같이 나무라는 15세 기생의 서릿발 같은 열기(烈氣)가 읽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그러고는 “엎드려 원컨데 신의 죄를 벌하여 네 수레에 팔다리를 매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주소서.”로 마지막까지 상소 형식을 갖추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남대문 밖 한림원에 시집 못 간 두 처녀가 있는데, 전하께서 이들의 혼처를 주선하게 해주시면 혼수는 신이 마련하겠사옵니다.”로 할 일 없으면 가난한 여자 중매나 서라는 읍소로 국왕을 가지고 놀고 있다.

기승전결의 호흡을 잘 갖춘 완벽한 현대소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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