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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4] 아, 소백산·1

2022. 02. 03 by 영주시민신문

어렸을 때 구두들(九邱)에서 바라본 소백산은 거대한 나비였다. 비로봉을 머리로 하여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은 참 장관이었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소백산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냥 우리는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날고 싶을 만큼 살아가는 현실은 어려웠다. 어쩌다가 우리는 나비 품으로 들어갈 때가 있었는데, 소백산으로 산 뽕을 따러 가는 일이었다.

살림이 어려웠던 60년, 70년대 초반 농촌의 5월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때우기가 쉽지 않았다. 보리쌀도 떨어져서 까슬까슬한 수수밥을 해 먹기도 했으니 집집마다 돈이 있을 리가 없다. 춘궁기에 유일하게 농촌에 돈이 되는 일이 누에치기였다.

6월쯤에 누에가 마지막 잠을 잘 때쯤이면 뽕이 거덜이 나서 소백산으로 산 뽕을 따러 가는 것이다. 고무신을 신고 온 산을 헤매면서 뽕을 따면서 소백산을 만났으니, 어린 시절의 소백산은 나비 품처럼 포근하지만은 않았다.

근래 몇 년간 소백산을 백 번 넘게 올랐다. 다른 산을 오른 것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 소백산과 연애라도 하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달밭골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만 고집하면서 수도 없이 올랐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에 대한 경험이 적은 터라 비로봉 오르는 길이 가장 부드럽고 친근감이 갔다. 달밭골 초입에 있는 ‘달뜨는 민박집’ 주인장의 인정 어린 얼굴과 안주인의 조용조용한 말솜씨가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산을 오르면서 왜 오늘도 산을 오르지, 그것도 소백산만 미친 듯이 오르내리는지를 반문할 때가 있다. 산이 거기 있어서 산을 오른다는 말은 너무 격이 높았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란 말씀은 너무 높은 경지의 깨달음이었다.

소백산은 영주 사람들의 로망이다. 영주 사람들은 소백산을 세속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고통의 연속이다. 소백산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불국정토였다. 소백산 주봉을 비로봉, 연화봉이라 이름 붙인 것은 어느 스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탁월한 안목이기도 하겠으나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들의 소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고도 하겠다.

비로봉은 비로자나불에서 따온 이름이고, 연화봉은 연꽃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연화봉이 연꽃 모양으로 연화대로 펼쳐지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인 비로봉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화엄의 세계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로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의 진리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세상을 말한다. 이상적인 불국정토인 것이다. 소백산은 바로 영주 사람들의 이런 염원을 담고 있다.

영주 사람들은 비로봉을 보면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날 때 연꽃에 싸여 환생한, 그런 좋은 세상을 갈망하면서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이런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소백산을 오르는 마음이 한결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조선 중종 때의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다가 소백산을 보면서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라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봄에 흐드러진 철쭉이나 여름 비로봉에 정상에 지천으로 핀 야생화, 가을 단풍이나 겨울 눈 덮인 소백산을 보면 산 중에 으뜸임을 알만도 한데 그중에서도 이런 사계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면서 소백산에게 넙죽 절을 한 남사고의 외경심(畏敬心)을 알 수도 있겠다.

우리 영주 사람들은 소백산이 있어서 행복하다. 언젠가 비로봉 정상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였다. 전라도 쪽에서 온 등산객과 얘기를 나누다가 이런 좋은 산이 곁에 있어서 참 행복하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소백산이 우리 곁에 있었다. 식구들이 곁에서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듯이 소백산이 바로 옆에서 우리의 삶을 보듬고 있다.

우리 시대의 화두 중 하나는 ‘쉼’이다. 쉬고 싶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쉼이 있고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은 바로 영주 사람들의 집을 두르고 있는 뒷산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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