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다. 바다가 그랬다. 바다에 대해서 쓰고 싶었지만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던 적이 있다. 오히려 대천 앞 바위 위에서 바다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어 밀물에 쓸려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글쓰기 책도 있지만 엄청난 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상(事象) 앞에서는 가벼운 생각이 사물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뼛속까지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물의 절대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무섬이 그랬다. 철들어 본 무섬의 고즈넉함은 절대적이었다. 무섬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무섬을 찾았을 때 고즈넉함의 절대성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섬만의 고즈넉함은 언어 능력의 한계를 절감케 했다.
한 줄의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무섬의 고즈넉함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금 손상돼도 고쳐서 쓸 수 있지만 고즈넉함이란 깨어지는 순간 이미 고즈넉함의 본질을 잃기 때문이다.
무섬을 돌아 흐르는 내성천의 물 흐름은 정말 고즈넉하다. 무섬에 도착할 때까지 영주를 지나는 서천은 많은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태백산 골짜기를 끼고 흐르던 내성천도 인간사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으로 이리저리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어쩌면 분노로 가득해 노도로 흐를 때도 많았다.
이렇게 두물머리에서 만난 동천과 서천이 천천히 무섬마을을 돌아 환학정(喚鶴亭) 앞에 이르면 물길은 양순해지면서 고요해진다. 물살을 모두 감추고 고즈넉하여 모든 흐름을 안으로 감춘다. 여기에 외나무다리는 이 모든 흐름의 화룡점정이다.
무섬에 철을 따라 피는 꽃도 고즈넉하다. 코스모스, 접시꽃, 호박꽃, 해바라기, 봉숭아, 옥수수꽃을 보면 화려하지 않다. 무섬다운 꽃을 심었다. 마을길도 그렇다. 꼬불꼬불한 길들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고즈넉하다. 고택이라 하여 큰길을 차지하지 않고, 가옥이라 하여 막다른 골목에 들지 않는다. 자연의 고즈넉함을 닮은 길과 집을 만날 수 있다. 전봇대가 없고 삐죽한 것이 없어서 고즈넉함에 한몫을 한다. 여기에다가 어스름한 저녁 시간이나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가을을 만나면 무섬의 고즈넉함은 갑절을 더한다.
무섬을 얘기할 때 고즈넉함과 느림을 함께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즈넉함의 미학과 느림의 미학은 다르다. 느림은 인위적인 조작이 가능하지만 고즈넉함은 인위적인 기교로 만들지 못한다. 느림은 어느 장소에서든지 작정하면 만들 수 있지만 고즈넉함은 아무리 작정해도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없다. 느림은 전략을 가지고 설계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면 가능하지만 고즈넉함은 자연과 함께 하면서 오랜 전통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잠깐 동안의 기교로는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섬의 고즈넉함의 미학은 느림의 미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고즈넉함은 무섬마을의 본질이다. 고즈넉함은 정지된 상태와 같은 미학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를 중시하는 우리 시대에 무섬의 고즈넉함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을을 지키는 분들의 엄청난 절제나 비움이 요구될 것이다. 영주시민들의 도움이나 무섬을 지키기 위한 공무원들의 안목도 필요할 것이다. 만약에 고즈넉함을 무너뜨린 부분이 있다면 반성과 성찰도 필요할 것이고 보여주기보다는 지키기에 많은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고 했다. 무섬마을은 마을이 아니라 마을이 꾸는 고즈넉한 꿈이다. 우리는 무섬의 고즈넉함을 잘 지켜내야 한다. 체류형 관광지라고 해서 고즈넉함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무섬을 찾는 사람들 대다수는 이런 고즈넉한 꿈을 사랑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길을 내고 꽃을 심고 사람들이 모일 때, 혹여나 이런 행위들이 무섬의 고즈넉함을 훼손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고민하다보면 우리는 무섬의 고즈넉함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