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 [223] 상소문으로 본 조선의 선비정신 ①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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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 [223] 상소문으로 본 조선의 선비정신 ①

2022. 01. 17 by 영주시민신문

진인 조은산의 「시무 7조」라는 것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었다. 조선조 상소문을 패러디했음은 물론이다. 예부터 상소는 중요한 언로(言路)의 하나로 신문고처럼 문무백관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상소도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과 절차가 있었다.

우선 익명서는 접수하지 않았으며, 왕의 행차에 함부로 뛰어드는 직접 행위는 금지되었다. 반드시 승정원을 경유하여 임금에게 전달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먼저 규격, 문장의 법식, 오자, 성명 오기 등을 심사했다. 서식과 규격, 전달 방식도 상소자의 수준과 상소의 종류에 따라 차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옥산서원 구인당(강학당)
옥산서원 구인당(강학당)

조선 500년 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소가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회자 되는 상소는 대체로 1539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중종에게 올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 1555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1568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조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세 손가락으로 꼽는다.

여기에 1557년 단양군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명종에게 올린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를 더하면 이른바 ‘조선 4대 상소문’이 된다. 조선 4대 상소문은 모두 16세기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상소는 국왕을 크게 꾸짖는 내용이므로, 누구나 아무렇게 올릴 수 있는 그런 쉬운 문건은 아니다.

회재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는 김안로 등 훈신들에 휘둘려 정사를 그르친 중종에게 일갈하는 상소문이다.

“왕은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모든 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대저 왕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본이니 근본이 바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조정을 바로잡고 백관과 백성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까?”로 시작하여 “① 嚴家政(엄가정, 왕실 집안을 엄하게 다스릴 것), ② 養國本(양국본, 나라의 근본인 세자를 잘 가르칠 것), ③ 正朝廷(정조정, 조정을 바르게 다스릴 것), ④ 愼用捨(신용사, 관리의 임명과 해임을 신중히 할 것), ⑤ 順天道(순천도, 하늘의 도를 따를 것), ⑥ 正人心(정인심, 인성을 바로 잡을 것), ⑦ 廣言路(광언로, 언로를 넓힐 것), ⑧ 戒後欲(계후욕, 사치 욕망을 경계할 것), ⑨ 慘軍政(참군정, 군정을 개혁할 것), ⑩ 審幾微(심기미, 모든 일의 기미를 잘 살필 것)” 등으로 유교적 이상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론을 10가지를 제시하였다. 말이 제시이지 사실상 왕을 조목조목 훈계한 내용이다.

그 후 중종은 오히려 이언적을 중용(重用)하였고, 그는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역임하게 된다. 이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국왕의 그릇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명 조식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疎)는 더욱 가관이다. 자신을 등용하고자 현감(縣監) 교지를 내린 명종의 명령을 거절하는 이유로 국왕의 무능을 직설적으로 들어가며 독설을 퍼부었다.

“임금이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히히덕거리며 술 마시기에 정신이 없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거들먹거리며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가죽이 다 닳아지면 털이 붙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전(慈殿, 왕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궁중의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殿下)께서는 어려서 선왕의 아들(孤嗣)일 뿐이니, 천백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라며 국왕의 교지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거절을 넘어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상소문이었다. 감히 군왕의 신민(臣民)으로서 입에 올릴 수 없는 비판과 나무람이었기에 절대자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으로 여겨졌다. 반역죄로 처형할 수도 있을 내용이었다. 마치 국왕에게 어린아이 훈계하듯이 조목조목 꾸짖는 모습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원색적인 비판이었다.

명종이 당연히 크게 노했으나, 경상좌도의 대표적 선비인 조식을 어쩔 수는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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