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인이 되신 지 오래 되셨지만 ‘절통’이란 이름을 가진 분이 계셨다. 그분 함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이제는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부모님의 바람이 들어 있는 이름일 것이라 추측해 본다. 살아 계셨으면 백세가 훨씬 넘었을 연세시니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도 무척 어려운 시대를 살았을 분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이라고 하겠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코로나 상황이 계속되면서 가끔 그 어르신의 함자를 떠올린다. 삶의 고통은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일상을 뺏겨 버렸다. 만남의 즐거움도 뺏기고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도 사라졌다. 수다를 떨면서 잠시 시름을 잊어버릴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지고 괜히 눈치를 슬금슬금 보게 된다. 질병이 옆에 상존해 있다는 게 이렇게 불편하고 두려운 것일 줄을 몰랐다.
이육사는 시 ‘절정’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했다. 육사는 강철같이 추운 겨울 속에서 무지개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 거대한 질병 앞에 서 있는 우리들 삶의 터전이 바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겨울 날씨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정리되고, 정복되고, 사라질 것이지만 지금 현재는 춥기 그지없고, 육사가 바라봤던 그 희망의 무지개는 아직은 멀리 있어 희미하다.
추울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따뜻함이 제일이다. 견고한 것은 강철과 같아서 차갑다. 그러니 너무 완고하여 견고한 것은 지금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완벽한 것은 틈이 없어서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완벽한 것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따뜻함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뾰족한 것은 어떤가? 뾰족해서 어울리지 못하니 이 또한 추운 계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품새다. 초월도 마찬가지다. 모나 보이지는 않지만 저 높은 곳에 있어서 왠지 쳐다보지 못하겠다.
코로나 때문에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고장 사람들도 마음의 온도를 높여야 한다. 우리 몸의 온도는 36.5˚인데 마음의 온도는 내려가 있다.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첫 번째 단계는 몸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라 한다. 마음의 질병도 마음의 온도를 높여야 치유될 수 있다. 몸의 온도는 족욕이나 따뜻한 물에 몸을 잠그면 올라가지만 마음의 온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언어밖에 없다.
영주 톺아보기에서는 영주를 자세히 살피면서 영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톺다’는 옷감 재료인 삼을 째서 끝을 가늘고 부드럽게 하려고 작은 톱으로 누르면서 긁어 훑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톺아보기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뜻으로 영주 톺아보기는 영주의 사상(事象)이나 영주 사람들의 생각, 삶의 모습이나 생활 문화 등, 영주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샅샅이 살펴보는 시론(時論)이기도 하다.
언어의 온도를 높이는 데는 반드시 따뜻한 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맹목적인 따뜻함이란 우리의 정신을 흐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적인 말은 차갑다기보다는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비판은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옳고 그름을 가려 평가하고 판정하는 것이기도 해서 우리는 비판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판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고, 건강에 좋은 온도를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10년 전에 절통 할머니의 함자를 듣고 이렇게 시를 마무리한 적이 있다. “죽는 날까지 절통으로만 남아 있어/ 큰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우리들의 잠을/ 화들짝 깨우고/ 배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그 말 없는 역사 앞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아픈 통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 한 마디라도 혈액 속에서 건져 올려서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