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21] 선비를 선비라 부르지 못하는 ‘선비의 고장’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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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21] 선비를 선비라 부르지 못하는 ‘선비의 고장’

2021. 12. 24 by 영주시민신문

“대개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오직 사람이 귀하오나, 소인에게 이르러서는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소인이 평생 서러운 것은,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가 되어 부모님이 낳아 길러준 은혜가 깊사온데,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400여 년 전 『홍길동전 洪吉童傳』에서 홍길동이 자신의 아버지인 대감에게 서자(庶子)로서의 슬픔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고초가 뼈에 사무쳐 있다.

‘선비의 고장’임을 자처하던 영주가 ‘선비를 선비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영주는 1998년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하면서 ‘선비의 고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0년이 넘었다. 당시 ‘양반의 고장’을 먼저 등록한 안동을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등록을 추진했던 ‘선비의 고장’은 다른 지자체로부터 폭발적인 반향을 불렀다. 특히, 신분 계층을 암시하는 듯한 슬로건 때문에 사용에 한계를 보이던 안동이 ‘선비의 고장’을 놓쳤다고 크게 무릎을 쳤다는 이야기는 세간에 파다하다.

급기야 안동은 짧은 ‘양반의 고장’ 슬로건을 포기하고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늘어진 슬로건으로 갈아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통쾌한 영주 슬로건의 승리였다. 이후 ‘선비’는 함양, 산청을 비롯한 전라도 장성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10여 개에 달하는 지자체들에 의해 ‘선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다투어 선비문화축제가 열렸다.

한국적 최고의 리더십으로 선비정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서울대학교의 정옥자 명예교수를 비롯한 저명한 인문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선비정신」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자체적으로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위기에서의 나라를 구한 의병활동을 그 예로 들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 ‘선비’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주 선비는 천생 출신이란 말인가?

<삼판서 고택>을 연결해서 ‘정도전 마케팅’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선비다리’ 건설이 무산되는가 하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문화도시 신청서>에도 ‘선비 문화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젊은 시민들의 거부감이 그 이유라고 한다. 젊은 시민들이 문화도시 선정위원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모르지만….

‘문화도시’란 도시의 문화자산을 적극적으로 발굴·육성함으로써 고유의 도시브랜드를 창출해 사회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사업이다. 전문가들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슬로건이 다른 데에 비해 차별화된 가치의 슬로건이라고 격찬을 하고 있는데도, 영주시는 끝내 <수행·실행·동행으로 만드는 행동문화도시 영주>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어정쩡한 주제를 가지고 법정(예비) 문화도시를 신청했고, 그간 현장 실사, 최종발표회 과정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여러 과정의 첫 단계도 꿰 보지 못한 체 서류 심사에서 일찌감치 낙방하고 말았다. 신청서 내용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심사위원들 쪽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그러는 동안, <문화로운 모디학교>를 주제로 문화도시를 신청한 안동은 그런 여러 단계를 통과하면서 심사 합격점을 받아 <예비 문화도시> 자격을 획득했다. 참담한 영주문화의 패배였다.

다시 『홍길동전』으로 돌아오면, 홍 판서 대답이 궁하다. “재상가 천생(賤生)이 비단 너뿐이 아니거늘, 네 어찌 방자함이 이 같으뇨? 차후 다시 이런 말이 있으면 용서치 못하리라.”

혹시나 했던 홍길동에게 아버지 홍 판서는, “다시는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윽박지름으로 답변을 끝맺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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