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대역죄인의 단골 유배지였고 바람으로 오가는 뱃길은 사고가 잦았으며 섬 특유의 무속과 토속신앙이 만연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섬사람을 교화하고 진휼과 학문으로 선정을 베풀어 오늘날까지 치적이 전설처럼 전해오는 네 사람의 영남 인물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올곧은 영남의 선비로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향리인 경상도보다 제주도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연구도 활발하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김천의 노촌 이약동, 영천의 병와 이형상, 봉화의 노봉 김정(1670~1737), 성주의 응와 이원조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노봉은 제주도민들에 의해 특별하게 꼽힌다.
66세의 고령으로 목사로 부임했지만, 노봉은 교육 시설이 없던 제주에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세우고 교학에 힘썼으며, 화북포(禾北浦)에 방파제를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어선을 축조하고 어로기술을 향상시켰고, 제주 생산물을 육지의 쌀과 교환하여 대동미로 비축했고 흉년에 구휼하여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했다. 산지천의 수질을 개선하고, 급고천, 감액천 등 새로운 우물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흥학(興學)과 애민(愛民)사상으로 “역대 목사 중 최고의 선정관(善政官)”이라고 칭송받는다. 조선조 오백년 286명의 제주 목사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노봉은 그 많은 목민관 중에서도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했고, 끝내 그가 진력을 다하던 이 섬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다. 자신이 스스로 돌을 져 날라 쌓은 화북포 방죽 객사에서 끝내 사망을 하니 백성들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부고를 전해들은 영조(英祖)대왕은 삼남의 방백(관찰사)으로 하여금 향리인 봉화 물야의 오록(창마)마을까지 그의 상여(喪輿)를 호송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 제주 유생들이 남해를 건너 영호남 2,000리를 안전하게 운구했다고 한다.
특히 제주도 화북의 아낙네들은 머리카락을 몇 개씩을 뽑아, 상여줄을 만드는데 섞었다고 하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제주민들이 그의 장례에 참석하면서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제주 솔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 지금의 창마마을 입구의 송림(松林)이라고 한다. 280년가량 되었다.
영주 휴천1동 유연당(悠然堂)에서 태어나 숙종 22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지금의 오록리 갈봉산 아래 터를 잡아 이사했으니, 후손들은 ‘오록개기조(梧麓開基祖)’로 추모한다. 옥천군수, 강릉도호부사, 강계도호부사, 제주목사 등을 거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어 가는 곳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암행어사가 당대 최고의 청백리로 추천했으나, 반대세력 때문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최근 ‘시대가 정치인의 덕목을 요구한다-재주 오목(五牧)을 찾아라’ 투표에서 당당 1위로 선정되었다. 또한, 물야면 오록리는 제주문화원의 ‘목사 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의 단골 방문지가 되었다. 이처럼 노봉은 제주도민의 가슴 속에 영구히 남아있는 인물이다.
제주시청에서는 약 30년 전부터 비역(碑域)을 정비하고,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오현단에다 노봉 선생 흥학비와 공덕비를 세웠다. 이웃 김만덕기념관 외벽에까지 노봉의 치적 벽화를 새겼고, 오천서원에서는 매년 춘추 향사로 그를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