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중학교 뒤로 난 남간재 고갯마루 남쪽편에 아담한 골짜기가 있다. 이른바 ‘서원마’이다. 이산서원이 처음 세워졌던 곳이라는 뜻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산이리(山伊里)였다.
당시 군수이던 안상(安瑺)이, “예로부터 이곳은 문예를 숭상하는 기운이 높아 선비 양성을 위한 여건은 성숙되었으나 그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으므로, 이에 인재양성, 교학부흥에 뜻을 두고 학사(學舍)를 건립한다”고 했다.
이때가 1558년(명종 13)이므로, 순흥에 소수서원이 건립된 지 15년 만이다. 이곳 영천(榮川, 영주)의 첫 서원이었던 이산서원은 도산서원보다 2년 먼저이고, 병산서원보다는 55년이나 앞서 창건된 서원이다. 1570년(선조 3) 퇴계 이황이 별세하자 2년 뒤 사당을 세우고 그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1574년(선조 7) 사액(賜額)을 받아냈다.
사액 시기로 봐도 도산서원보다 1년 앞서고, 병산서원보다는 무려 289년을 앞서는 명성을 자랑한다. 이 시기의 소수, 도산, 병산서원이 모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봐 이산서원도 어지간히 원형만 유지했더라면 이들과 같이 세계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산서원이 그간 이건과 훼철 등 잦은 병치레를 거치면서 더욱 병약해지고, 소수서원이라는 너무 큰 그늘에 가려 본래의 명성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흔히 ‘퇴계’하면 도산서원을 떠올리지만, 그건 퇴계 후학들의 설립이고, 진짜 퇴계의 혼은 이산서원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고 한다. 퇴계의 자문으로 창건되었고, 서원 명칭과 각 건물 이름을 퇴계가 손수 붙였으며, 생전(1559년)에 지은 기문(記文)과 원규(院規)는 후일 전국 모든 서원의 표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신의 학문을 집약한 성학십도(聖學十圖) 판각까지 이산서원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산서원을 ‘퇴계의 서원’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산서원은 퇴계가 타락한 민심을 개선하고 정신풍토를 바로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때 그 중심에 우뚝 서 있었던 서원이다. 따라서 “소수서원에는 그의 제자가 있고, 이산서원에는 그의 정신이 뭉쳐 있으며, 도산서원에는 그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들 한다.
길게는 400년 유랑생활과 짧게는 150년 훼철의 상처를 딛고 이산서원은 2021년 10월 13일, 이산면 석포리 동포(東浦) 언덕에서 역사적인 복원 고유제를 올리게 되었다. 1558년(명종 13)에 서원마(휴천1동)에 처음 창건되었던 이산서원은 1614년(광해군 6) 이산면 내림리로 이전했고,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36년 당시 위치에 경지당만 복원되었다.
다시 85년 만에 영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보상금 등을 합해 영주시가 이날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복원 고유제에는 도지사를 비롯한 지역 각 기관장은 물론 퇴계 종손을 비롯한 불천위 종가 종손, 도산서원 이사장을 비롯한 각 지역 서원 원장, 영주향교를 비롯한 각처 향교 전교 등 유림이 대거 운집하여 이산서원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복원된 건물은 중심 강당을 경지당(敬止堂), 동재를 성정재(誠正齋), 서재를 진수재(進修齋), 출입문을 지도문(志道門) 그리고 담장 밖의 누각에 관물대(觀物臺)라고 편액 되어 있었다. 모두 퇴계의 명명을 따랐다. 새로 쓴 「伊山書院」현판은 서예의 대가 석계 김태균의 글씨이고, 「誠正齋」와 「進修齋」 편액 글씨는 장덕필이 담당하였다고 한다.
배향(配享) 인물도 주 배향인 퇴계 선생 외에 창건 당시 묘우상량문(廟宇上樑文)을 지었던 백암(栢巖) 김륵과 봉안문(奉安文)을 지었던 소고(嘯皐) 박승임이 추가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