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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16] 한글날이면 생각나는 월인석보(훈민정음) 판목

2021. 10. 08 by 영주시민신문
안동에서 복각 기증한 훈민정음 언해 판각
안동에서 복각 기증한 훈민정음 언해 판각

희방사(喜方寺)는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세조)이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佛事)를 도모한 곳이다. 나중에는 아들 도원군이 요절하자 세조는 다시 이곳에서 불은(佛恩)을 입고자 목판을 제작하여 헌공(獻供)한다. 이것이 이른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목이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그리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합쳐 놓은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희방사를 불경 발간 사찰 반열에 올려놓은 그 목판은 진귀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6.25) 중 희방사 내에 숨어 있던 인민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절을 불태웠으니 천연의 요새에서 400여 년간이나 잘 갈무리되어 오던 진귀한 월인석보 판각을 모조리 불태우는 천고의 변고가 생긴 것이다.

「월인석보」는 최초로 한글을 사용하여 불교 서적을 번역한 국책 사업이어서 조선 전기 불교와 훈민정음(訓民正音) 연구에 다시없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초창기 훈민정음(한글)으로 번역했음에도, 국어의 문장 구조에 맞게 매우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있어 훌륭하다고 한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19권이다. 이 중 1, 2권은 희방사가, 7, 8권은 비로사가 원소장처이다. 특히, 희방사본 1권 맨 앞머리에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 있는데, 『나랏말ᄊᆞ미…』로 시작하는 그 한글 서문이 바로 다시없다는 『훈민정음 서문』인 것이다.

하여간, 희방사에 보관되었던 「월인석보」 판목 앞부분이 「훈민정음 언해」이고, 이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과도 견줄 수 있는 대단한 보물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영주에서는 그 훈민정음이나 한글 활용이 거의 없는 편이다. 판목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인근 안동이 발 빠르게 판목을 복각했다. 목적은 ‘안동 중심의 한글문화유산 정리’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했지만, 실상 안동을 한글(훈민정음)의 본원지(本源地)로 만들기 위한 대단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훈민정음 언해본」(한글) 근원지를 탈취당할 위기에서도 ‘영주의 선비정신’은 너무나 태연했던 게 실상이었다.

그때 마침 필자는 안동의 경안학원 법인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연고로 사업을 주관하는 (사)유교문화보존회의 초청을 받아 <훈민정음 언해본 복각> 사업을 심의할 수 있었고, 필자의 끈질긴 설득으로 당초 계획에는 없었던 복각 목판 1질이 원적지 희방사로 기증될 수 있었음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과정에서의 사업 주관 실무자(임노직) 노력 또한 녹록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늘상 지나치는 희방사의 월인석보(훈민정음 언해본)는 우리가 대충 지나칠 그런 문화재가 아니다. 이런 정도의 문화재급이라면 ‘세계한글축전’ 감으로도 충분하지만, 우리의 눈에 이런 보물이 눈에 확 달려들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모르긴 해도 안동의 <한글 본원지 작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한글축전>, <한글공원>, <한글탑> 등의 형태로 그 실체가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그때에도 우리는 넋을 놓고 쳐다보고만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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