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15] 바위 글씨와 선비의 산수문화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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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15] 바위 글씨와 선비의 산수문화

2021. 09. 16 by 영주시민신문

전북의 한 자치 단체가 아름다운 자연 암벽에 전동 드릴로 글씨를 새겨 넣었다는 기사가 떴다. 명산의 암벽을 파내 자연환경을 훼손했다고 주민들과 등산객들의 원성을 산다는 내용이다.

섬진강 비경을 담았다 하여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된 용궐산 암반에 큼지막한 한자 휘호들이 새겨졌단다. 한석봉, 김정희 등 조선 최고 명필가의 서체이다. ‘고사성어 길’을 만들겠다며 해당 지자체가 용궐산 암벽 잔도를 따라 조선 명필들의 한자 글귀를 새기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이미 선비들의 바위 글씨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용궐산 글씨 조각이 후대의 명물이 될 것이라고 으쓱댄단다.

21세기 들면서 대중관광이 다소 쇠퇴 기미를 보이자, 대신에 소규모 주제 관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틈새를 비집고, 조선 선비의 산수문화가 새로운 여행 트랜드로 불쑥 솟아나고 있다. 구곡, 팔경, 동천 탐방이 그것이다.

봉래 양사언의 초서, 하암동천
봉래 양사언의 초서, 하암동천

경북 북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바위 글씨를 보유하고 있다. 영주에만 해도 20여 동천이 있고, 200개에 가까운 바위 글씨가 발견되고 있다.

바위 글씨는 몇몇 표지석 성향을 제외하고 나면 글씨 내용의 대부분이 선비들의 자세, 다짐, 독려, 그리고 후손들을 위한 교육적 내용 등을 내포하고 있어 매우 바람직한 인성 교육장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더구나 이들 모두가 조선의 선비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들이어서 보존 가치도 상당하다는 의견이다.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것을 ‘각자(刻字)’ 또는 암각(巖刻)이라고 한다. 이런 풍습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크게 성행하였다. 중국과는 또 다른 조선 후기 선비의 산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금강산 만폭동에 남아 있는 명필 양사언의 바위 글씨는 “만폭동 경치 값이 천 냥이면, 그중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 값”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이 꼭 구경하는 필수 관광코스였다고 한다.

영주에도 봉래 양사언의 멋진 바위 글씨가 있지만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霞巖洞天(하암동천)」이라는 초서체 암각이 그것인데, 부석면 소천리 수구(水口) 소위 ‘낙하암쉼터’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원래부터 이곳 지명은 「대적벽」이라고 『재향지』는 말하고 있다.

이곳 쉼터에서 건너다보이는 서쪽 암벽이 그리도 높고 대단하여 「대적벽」으로 명명되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절벽 허리를 과감히(?) 잘라내 도로를 만들었으므로 당연히 경치는 전만 같지 못하다.

그나마 도로 아래쪽 바위벽에 그리 대단하다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684)의 글씨가 암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 가까스로 「대적벽」 이름값을 수호해내는 모양새다. 그러니 이곳은 “대적벽 경치가 천 냥이면, 천 냥 모두가 양사언의 글씨 값”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흔히, 봉래 양사언을 조선의 4대 명필, 혹은 조선 광초 3인방으로 부른다. 그는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해지며, 부석의 대적벽 글씨도 세로 2m가 넘는 대작이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은 명작에 속한다. 이익은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봉래의 글씨는 표표(飄飄)하여 마치 하늘에 치솟고 허공을 걸어가는 기상이 있으니…」라고 표현하여 그의 글씨를 인간의 작품을 넘어선 신선의 글씨로 평가하려 하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수학했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에게 천문과 역술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다던 양봉래가 이곳 낙하암천을 유람한 흔적으로 볼 수 있는데, 부석 동편에 있는 인근 마을 이름이 ‘봉래골’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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