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 선생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로 추앙된다.
그는 한문학자, 국문학자, 중국문학자, 한시인, 한문문장가, 고전번역가, 교육자, 서법가, 유림지도자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당대 석학으로 활약하였다.
안동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에서 출생한 그는 퇴계(退溪) 선생의 14세손이다. 후손 가운데서도 종가계통의 집안으로 증조부까지는 퇴계의 직계 종손이었고, 조부는 종손의 아우였다.
연민의 가계는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 항렬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집안에 걸출한 학자들이 많았으므로 그의 학문 분위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조부 이중인(李中寅)은, 자신이 병약하여 큰 공부를 이루지 못한 탓을 연민에게서 풀고자 다섯 살 때부터 데리고 자면서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다.
훌륭한 스승을 직접 간택하기도 하고, 학문이 높은 집안에 장가들게 하였다. 또 외가가 있는 영주 줄포리에 보내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서주(西洲) 김사진(金思鎭) 등에게 배우게 하였다. 13세 때 전주유씨 종가에 장가들게 하여 장인인 회계(匯溪) 유건우(柳健宇)에게도 배우게도 했다.
특히 외재 정태진은 심산 김창숙과 함께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유림의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 중 한 분이다. 그래서 연민은 23세 때까지 전통 방식의 한학 공부에 전념했지만, 내심 새로운 사고와 학문에 대한 갈증이 늘 충전되어 있었다.
조부도 늘 그에게 “도포 입고 꿇어앉는 선비가 되지 말라”고 훈계하였기에, 이전의 것만 쫓는 그런 형식적인 선비가 아니라 자주성 학문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리학 연구만이 아니라 실학에도 매진하고, 새로운 학문을 위해 외국 유학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학 교는 집안이 이미 허락하지 않았다.
고민이 한창이던 1939년 2월, 풍기의 송지영(宋志英)이, “내가 지금 북경대학(北京大學) 유학을 떠나는데…”라고 동행을 부추겨 조부 몰래 상경해 보지만,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실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울에 버티면서 신학문을 단단히 결심한 터에 마침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 學院, 성균관대 전신) 한문 연구생 공모가 있었고, 연민이 합격했다. 숙식이 해결되고, 장학금으로 책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또한, 그 부근의 고전도서관에서 중국의 《사고 전서(四庫全書)》 등 귀한 책들을 마음껏 열람할 수 있었다. 명륜전문학원에서 연민은 교수로 있던 성암(聖巖) 김태준(金台俊)을 만나 신학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당대 한문학의 대가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육당 최남선(崔南善) 등을 만나 종유(從遊)하면서 20대에 이미 청년 문장가의 이름을 올렸다. 이때 명륜전문학원 5년의 독실한 공부가 그의 한문학의 깊이를 더해 주었고, 신학문의 체계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연민이 사실상의 첫 직장을 영주에서 시작하게 된다. 1946년 4월, 초기 영주농업 학교(영주제일고 전신)에서 교편을 잡은 것이다. 이후 심산의 권유로 성균관대학에 진학하여 학교와 직장을 병행하여 1952년 국문과를 졸업했고, 이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성균관대학 중문학과가 창설되자 조교수로 부임하여 학과장을 맡았다. 총장이었던 심산 김창숙의 일도 돕고, 대학 운영에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이 심산을 쫓아내자 연민도 1년 만에 교수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그는 실직 중에도 매일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에 나가 자료를 찾았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저서를 내었는데, 《춘향전》 주석서를 간행한 정음사가 외솔 최현배(崔鉉培) 교수의 아들 출판사였다. 연세대 부총장이던 외솔 최현배가 이 책을 보고 탄복하여 백낙준( 白樂濬) 총장에게 연민을 천거하여 전격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연민은 안정되게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고, 총 80종의 저서와 한시 3000 여 수, 문장 2500편 정도를 작성했으며, 그 수준은 중국이 먼저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도 <칠성루중수기(七星樓重 修記)> 외 여러 기문과 문장, 글씨가 다수 남아 있어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