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에는 읍성이 3개가 있어 ‘읍성의 고장’이라고 부른단다. 영주에도 읍성이 3개나 있는데 ‘읍성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고창의 경우 고창읍성, 무장읍성, 흥덕읍성 이렇게 3개의 읍성이 있단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창, 무장, 흥덕현이 통폐합하면서 고창군이 되었기에 읍성이 3개 있게 되었다. 현(縣)마다 하나씩 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적의 침입이 잦은 서남 해안가 고을[縣] 단위는 거의 하나씩 읍성을 축조했다.
하지만 영주의 경우에는 해안가와 상당히 떨어진 내륙인데도 읍성이 3개나 있어 특이하다. 영주는 통폐합되기 전 행정구역이 순흥(順興), 풍기(豐基), 영천(榮川)이었다. 그래서 순흥읍성(順興邑城), 풍기읍성(豐基邑城), 구성산성(龜城山城) 이렇게 3개의 읍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성산성은 이름은 산성이지만 높은 곳이 아니어서 거의 읍성으로 분류된다.
1750년경 발간된 해동지도에는 「순흥읍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순흥읍성은 현재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시가지 안쪽으로 일부 형태가 남아있고, 전통놀이 ‘순흥초군청줄다리기’ 행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큰 줄다리기가 읍성을 중심으로 성하(城下), 성북(城北)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게 그것이다.
해동지도에서 「풍기읍성」 또한 보이지 않지만,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성내(城內), 동문, 서문, 토성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서문거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동부리에 토성의 일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경상도지리지에는 「구성산성」이 언급되어 있다. 홍무 갑술년에 시축했다는 기록이다. 홍무 갑술년은 1393년으로 태조 2년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구성산성」은 600살이 넘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시축(始築)이 시축인지 수축(修築)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성의 축조 양식으로 보아, 훨씬 이전인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축성 기술로 보이는 형태가 성곽 아랫부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1000여 년이 넘은 성곽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영주에는 왜 읍성이 3개나 있었던 걸까? 그 원인을 죽령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죽령은 지금부터 약 1900년 전에 개척되었다. 이곳 죽령에는 산성이 남아있다. “선조 28년(1595) 임진왜란 중에 왜적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이것을 죽령산성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대신들이 죽령을 포함한 3영로를 요새화하자고 상소했을 정도로 죽령은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 죽령 아래에 풍기읍성이 있고 순흥읍성이 있었던 것은, 자체가 관문은 아닐지라도, 관문의 역할을 돕는 이유로 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하다. 해안마을이야 읍성이 당연하겠지만, 내륙의 땅 영주에 유독 읍성이 3개나 축조되었던 것은 죽령의 중요성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하여간 영주에는 읍성이 3개나 있다. 우리 지역에 이렇게 3읍성이 있지만,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읍성의 고장>으로 가꾸어 나가기에 좋은 환경이지만 복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창의 경우 고창읍성과 무장읍성을 복원하고, 흥덕읍성까지 복원하여 읍성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고창과 쌍벽을 겨룰 수 있는 곳은 영주뿐이라고 한다.
영주시가 <읍성의 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