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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07]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 관찰사의 선정

2021. 05. 21 by 영주시민신문
춘양 각화사 입구의 관찰사 불망비
춘양 각화사 입구의 관찰사 불망비

추사의 세한도가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자, 추사의 아버지 또한 다시 세간을 오르내린다.

1815년 경상도 관찰사로 인연을 맺은 김노경이 추사의 아버지이다. 그는 충남 예산 출신이다.

춘양 각화사(覺華寺)로 진입하는 진입로가 막 끝날 무렵, 오른편 숲속으로 지방유형문화재라는 간판을 옆에 낀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그 뒤쪽으로 자신의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삐뚜름한 비석이 두 개 연이어 보인다.

두 개 비석 중 왼쪽에 조금 더 커 보이는 비석에는 가슴골을 타고 「觀察使金相國諱魯敬功德不忘碑(관찰사김상국휘노경공덕불망비)」라는 내리 글씨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노경의 공덕비이다.

‘관찰사(觀察使)’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당시 경상남도, 경상북도로 분리되지 않았을 때의 경상도 최고 사령관이니 여간 대단한 지방관이 아니다. 비문에 나오는 ‘상국(相國)’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최고의 호칭에 해당하고, 관찰사 이름이 ‘김노경’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비문의 내용은, ‘상국’으로 높이 받드는 경상도 최고 사령관인 관찰사 이름이 김노경인데, 그의 재임기간 동안의 선정(善政)에 대한 공덕을 오랫동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주민들이 불망비를 세운다는 그런 내용이다.

관찰사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은 절세(絶世)의 서예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이다.

1801년(순조 1)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내고, 1805년 현감으로서 문과에 급제, 지평‧승지·이조참판을 거쳐 1815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1830년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전남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기도 한다.

신라 경순왕 비문 및 신의왕후 탄강구 묘비에 글씨를 남길 정도로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빼어난 글씨가 아들 추사(김정희)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어 조선 최고의 서예가로 성장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맏아들 추사에 이어, 둘째 아들 김명희도 예술가로 서예 및 금속 학자여서, 그러고 보면 김노경 집안이 모두 예술가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춘양 각화사 입구에 있는 김노경의 공덕비 외에, 해인사(海印寺) 비림(碑林)에도 김노경의 공덕비가 있다. 「巡相國金公魯敬勝功德碑(순상국김공노경승공덕비)」라고 새겨져 있다.

1817년 해인사 6차 대화재 때 마침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던 김노경은 자신의 사재 1만냥을 선뜻 헌성(獻誠) 했고, 아들 추사로 하여금 ‘해인사중건권선문’을 써 시주를 권하도록 함으로써 도내 각 현의 군수들이 1만냥을 모금하도록 알선하는 등 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대적광전이 복원되었으며, 이런 연유로 1821년 김노경의 공덕비가 해인사에 세워진 것이다.

김노경은 칠곡도호부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칠곡도호부는 가산산성 내에서 군위·의흥·신녕·하양의 네 현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관아가 산성 안에 있어 불편하였으므로 그가 나라에 장계(狀啓)를 올려 칠곡도호부를 팔거현으로 옮기도록 한 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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