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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前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 확대경[203]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죽지랑(竹旨郞)

2021. 04. 01 by 영주시민신문

- 죽지령[竹嶺] 거사가 환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비

신라의 관리 김술종(金述宗)이 삭주도독사로 부임하기 위해 죽지령(竹旨嶺, 지금의 죽령)에 다다랐을 때 한 거사(居士)가 길에 있는 바위를 힘껏 치우고 있었다. 술종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았고, 거사는 술종의 당당한 모습에 심취했다. 술종이 임지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사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꿈을 꿨다.

신기하게도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술종이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알아보았더니, 술종이 꿈을 꾸던 날 거사가 죽었다고 했다.

놀랍고 괴이해서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공은 이렇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주검을 죽지령 북쪽에 장사하고, 돌 미륵(彌勒)을 무덤 앞에 세워 주었다. 그로부터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죽지령의 이름을 따 「죽지」라 불렀다.

이 아이가 자라서 화랑이 되고, 김유신의 부원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으며, 이후 4대(진덕, 무열, 문무, 신문왕)에 걸쳐 재상을 지낸 「죽지랑」이다. 죽지랑은 고귀한 인품의 선비인지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의 미륵상 공덕(功德)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미륵의 화신으로 여길 만큼 높이 숭앙(崇仰)된 인물이었다. 특히 화랑들이 그를 따랐다. 그중에서 득오라는 낭도가 죽지랑을 각별히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지랑이 낭도들을 교화함에 득오가 보이지 않았다. 모량부의 한 관리(익선)가 득오를 데려가 부산성 창고지기로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국통일이 끝난 후 화랑도의 권위가 쇠퇴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죽지랑이 즉시 찾아가 득오의 휴가를 청했지만 즉석에서 거절당했다.

낭도를 아끼는 죽지랑의 인품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득오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위대했던 노화랑(老花郞)이 일개 벼슬아치에게 당하는 수모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면서까지 낭도를 구해내는 화랑도의 진정한 의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익선을 잡아다가 벌주려 했는데 미리 알고 숨어버리자 맏아들을 대신 잡아 동짓날 성안 연못에다 죄를 씻는 목욕을 시켜 얼어 죽었다. 그리고는 익선이 살던 마을(모량리) 사람들은 모두 벼슬에서 내쫓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는 지역(마을) 연좌제 엄벌을 내렸다고 한다.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의 의리를 사모하여 득오가 지은 향가이다. 죽지랑의 인품과 덕망을 실감하고 상상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나라에 충성하고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화랑정신의 고귀함을 들어있다. 더욱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구해 주었던 고마움과 존경심이 담겨있다.

김술종이 죽지령에서 만난 선비 같은 거사를 위해 미륵불상을 공덕하는 어진 마음, 아들 죽지랑이 득오에게 베푼 의리적 행동들은 모두 어쩌면 죽지령이 무언으로 가르쳐 준 선비정신에서 발원한 실천적 행동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상 죽지랑의 탄생지일 수도 있는 죽령을 오르는 희방사시설지구 언덕에는 이런 불멸의 의리를 간파한 이들에 의해 세워진 「모죽지랑가」 시비가 그날의 선비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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