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가(學徒歌)>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 보아라 / 소년이로(少年易老)에 학난성(學難成)하니/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불가경(不可輕)일세 /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고/ 낙락장송(落落長松)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棟粱)되네 /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기쁨 잊지 마라 /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東天朝日) 비쳐온다 /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 보아라 / 소년이로(少年易老)에 학난성(學難成)하니 / 일촌광음(一寸光陰)도 불가경(不可輕)일세
이 멜로디를 기억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으시리라.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 설움 그 비통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으랴! 우리가 살길은 오로지 젊은 학도(學徒)들이 조국을 가슴에 품고 세계를 바라보면서 죽어라고 공부하는 길밖에 없었기에 이 노래 가사를 곱씹어가며 눈물 섞어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최영철 연구사가 말하는 3.1운동 이전의 영주지역 항일투쟁은 소백산 일대의 의병항쟁, 그리고 풍기광복단, 대동상점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일제는 청일전쟁에 앞서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인하해 항일 의병이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다. 영주지역에서는 순흥의진(의병장 홍종선), 풍기의진(의병장 김교명), 영주의진(의병장 김우종)이 1896년 결성되었다.
특히 영주지역은 3개 도(道)의 접경에 위치하고, 태·소백산의 산간지역은 천연요새일 뿐 아니라 의병들에게는 유격전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그러기에 이곳은 경북지방에서 가장 많은 접전이 이루어진 곳이 되었다. 문경의 이강년 부대, 영덕의 신돌석 부대도 순흥으로 몰려들었다.
1913년에는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상주 출신의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풍기광복단’이 그것이었다. 이처럼 풍기는 『정감록』에 전쟁이나 재해가 없는 ‘十勝之地(십승지지)’여서 팔도에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출신지를 떠난 의병이나 지사(志士)들이 스며들기에 좋은 조건이 되었다.
이후 풍기광복단은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합류하면서 대한광복회로 재편되었고, 그 활동 범위는 만주로까지 이어진다.
한편 영주의 대동상점(현 동림당한의원)은 대한광복회의 활동 거점을 위해 조직원들이 경영하던 잡화상점이었다. 대동상점의 주인 박제선은 당시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이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례이다. 대동상점은 1918년 3월 군자금을 모금하던 단원이 영주헌병분견소에 체포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모두 체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