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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263] 평은면 강동2리

영주댐 수몰로 사라진 마을-천상(川上)에 다시 태어난 마을

2019. 09. 26 by 영주시민신문

내성천 은빛모래 반짝이던 강가마을 동막·강성·귓골
천상에 복숭아과원, 다정카페, 전원주택 새로 생겨

동막마을 옛 모습(2010)
귓골 옛모습(2013)

평은리 강동2리 가는 길
영주의 남부 적동교차로에서 경북대로를 타고 안동방향으로 가다가 평은리에서 내린다. 평은면사무소 앞 교차로에서 영주댐 둘레길을 따라 영주댐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카페다정’을 만난다. 여기가 강동2리 귓골마을 뒷산 중턱이었다. 강동2리는 내성천의 은빛모래 반짝이던 강가마을로 귓골, 강성, 동막마을이 있었으나 물에 잠겼다. 지난 8일 강동2리에 갔다. 이날 다정 카페에서 배석기 이장, 권택순 부녀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배 이장의 안내로 각 마을을 다니면서 마을의 역사와 유래를 듣고 왔다.

동막 골목길(2013)

역사 속의 강동2리
평은면 강동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영주의 옛이름)에 속했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천상리(川上里) 동막방(東幕坊), 성내방(城內坊,성안)이라 불렀다. 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천상면 동막리(東幕里), 성내리(城內里)로 개편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천상면 동막동(東幕洞)으로 개편되면서 성내리는 동막동에 포함되고, 강성동(江城洞)이 새로 생겼다. 이 때 귓골은 강성동에 포함됐다.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 평은면 강동2리로 통합됐고, 1980년 영풍군 평은면 강동2리, 1995년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성마을(2013)
동호정 옛모습(2013)
성안마을 보림사

각 마을의 유래
강동(江東)은 강(江) 동쪽이란 뜻이다. 강동2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동막’이다. 수몰 전에는 평은면소재지에서 예고개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그 남쪽에 성안(城內) 마을이 있고, 북쪽에 강성(江城)과 귓골 마을이 있었다.

동막은 강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막을 두른 듯 하다하여 동막(東幕)이라 불렀다. 또 마을 앞에 내성천이 돌아 흐르고 있어 동호(東湖)라 부르기도 했다. 동막을 ‘점동막’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전에 이곳에 옹기점이 있다하여 점동막(店東幕)이라 했다. 점동막에서 마을 안쪽으로 700m가량 올라가면 안동막이다.

성안은 동막교에서 영주댐 방향으로 1km쯤 내려가다가 보림사 표지판에서 좌회전하여 산속으로 2km가량 들어가서 있는 산중마을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성(城)과 같다하여 성안(城內)이라 부른다. 골이 깊고 안쪽이 넓어 예전에 수십 호가 살던 피난처라고 한다.

동막교에서 북쪽으로 1km지점에 강성마을이 있었다. 강이 성을 이루고 있다하여 강성(江城)이라 했다. 또 강성에서 북쪽방향으로 1km 지점에 ‘귓골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귓골은 마을 뒷산이 고양이 형상이고, 낮은 봉오리들은 쥐가 새끼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지형을 이루고 있어 ‘쥣골’이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귓골로 부르게 됐다한다. 귓골 뒤 산중으로 500m가량 더 올라가면 ‘양잠’ 마을이 나온다. 양지암이(養芝菴)이란 (수안김씨) 재사(齋舍)가 있어 지명이 됐다. 이 ‘양지암’이 세월이 흐르면서 ‘양잠’이 됐다.

안동막 가는 길

흥해배씨 집성촌 동막
동막의 흥해배씨(시조:裵景分)는 고려충신 배상지(裵尙志,1351-1413)의 후손들이다.

배상지의 2남 환(桓)은 관찰사를 지냈고, 환의 아들 효사(孝思,1618-1685)는 언양 현감을 지낸 후 이시애난(亂) 때 남이장군(南怡將軍)을 따라 역적을 토벌 할 때 큰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효사의 현손 흥개(興介,통훈대부)는 청산 현감을 지냈고, 흥개의 아들 배응희(裵應希)가 동막에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안동막에 사는 배광태(82) 어르신은 “응희 선조께서는 학문을 즐기고 경전에 박통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책을 짊어지고 송리원 위 금계(金溪)로 몸을 피하셨다가 난이 끝난 후 1600년대 초 영지산 아래 동막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뽕나무를 심어 자손들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동막에 살다가 수몰로 안동막으로 올라온 배석기 이장은 “응희 선조께서 처음 터 잡으신 곳은 ‘안동막’이었다”며 “제가 어릴 적 안동막에는 흥해배씨만 13가구정도 살았고, 동막에 27가구가 사는 등 40여 호가 사는 흥해배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안동막에 3집만 살고 있다”고 했다.

다정카페

천상(川上) 태어난 다정카페
천상은 ‘내성천 위’라는 뜻이다. 기자가 마을탐방 가서 마을회관이 아닌 카페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난 것은 강동2리가 처음이다. 배석기 이장과 약속을 하고 영주댐 둘레길에 새로 생긴 다정카페로 갔다. 가면서 ‘이런 곳에 이런 카페가?’란 의문을 안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다정카페 권택순 대표를 만났다. 그는 강동2리 부녀회장이기도 하다. 권 대표는 “여기가 제 고향이예요. 귓골서 태어나고 평은초등학교를 다녔다. 바로 저기(길 건너 100여m)가 제 집이 있던 곳”이라며 “옛 고향집 옆에 카페를 지었다. 결혼해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에 와서 뒷산 언덕에 카페를 열게 됐으니 영주댐이 준 행운”이라고 말했다.

권대표의 아들 박재석(37) 씨는 “여기가 어머니의 고향 귓골이라고 들었다. 3년 전 오픈해서 따뜻한 커피와 음료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정성을 다하는 음료와 마음을 담은 서비스로 오시는 손님마다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양지암과 양잠마을

동호정과 양지암
이곳에도 옛 선비들이 남긴 흔적 동호정과 양지암이 있다. 동호정(東湖亭)은 동막마을 가운데 있었다. 동호정은 동막에 사는 흥해인 배현봉(裵顯奉,1884-1966)이 그의 부친 배상길(裵相吉,1864~1942)을 위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정자다. 동호공 배상길은 한말 1864년 강동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는 사현(士賢), 호는 문일(文日)이며, 흥해인이다. 부친은 배만보(裵萬輔)로 호조 참판에 증직됐다. 배석기 이장은 “동호정은 ‘현’자 ‘봉’자 큰(종)할아버지께서 ‘상’자 ‘길’자 증조할아버지를 위해 세운 정자”라며 “마을이 수몰되는 바람에 강 건너 문화재단지로 이전 복원했다”고 말했다.

양지암(養芝菴)은 경북도 민속문화재 제152호다. 조선 명종1년(1546) 김언광(金彦光)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齋舍)다. 배석기 이장은 “양지암 기록에 보면 인조16년(1638)에 무너진 것을 1687년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전체적으로 절 건물에 쓰이는 재료를 사용한 듯한 암자형 재실이다. 오래된 건축 기법들이 잘 유지되어 ‘민속문화재’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강동2리 사람들
강동리에 살던 수몰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이주단지로 가거나 타 지역으로 떠나고 일부는 높은 지대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했다. 그 중 안동막에는 4집이 산다.

배 이장도 이곳에 산다. 집 뒤에 2천여평의 복숭아 과원을 일구었는데 지금 출하가 한창이다. 복숭아 저장창고에서 만난 조현남(63,이장부인)씨는 “수몰 이후 도시 지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고향을 지키면서 복숭아 농장을 하고 싶다하여 남편 뜻에 따랐다”며 “지금은 복숭아 따는 재미가 있고, 아들딸들이 사회 각 분야에 나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배광태(82)·고홍연(73) 어르신은 “안동막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산다”면서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것은 으뜸인데 교통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18살 때 안동 이안에서 안동막으로 시집 왔다는 김영자(87) 할머니는 “여기는 논이 없어 한 달 가도 밥 구경 못하고 살았다”며 “조밥도 넉넉하게 못 먹었고 먹을 게 없으면 콩잎을 삶아 먹었다”고 말했다.

양잠 마을에는 할머니 4집이 산다. 안정 일원리에서 19살 때 가마타고 시집왔다는 정계순(84) 할머니는 “가마가 산속으로 십리를 지나 이 십리쯤 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20여호가 살 때는 아이들도 많고 동네도 컸다”며 “걔들이 커서 모두 잘됐다”고 말했다.

강명옥(81) 할머니는 “사람이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이 돌고 돌아가는 것 같다”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리고 “면사무소와 집수리 봉사단체에서 이렇게 집수리를 잘 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했다.

강계분(89)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로 시집와 살다보니 본동댁(本洞宅)이란 택호를 얻었다”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 굶는 날도 많았지만 8남매(3남5녀)를 낳았는데 모두 각처에서 한 몫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할머니의 아들 석중환(65) 씨는 “어릴 적 마을에 15집정도 살았는데 집집마다 10여 명씩 살았으니 동네가 북적거렸다”며 “참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른을 섬기고 민속놀이를 즐기며 협동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배석기 이장
권택순 부녀회장
강계분 할머니
김영자 할머니
정계순 할머니
배광태 어르신
강명옥 할머니
고홍연 할머니
조현남 씨
박재석 씨
석중환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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