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머리(智慧)를 모아 서로 돕고 사는 마을 ‘필두(弼頭)’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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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51] 가흥2동 필두마을

머리(智慧)를 모아 서로 돕고 사는 마을 ‘필두(弼頭)’

2019. 06. 18 by 영주시민신문

안동권·안동김·순흥안·평해황씨, 4성 화합 마을
필두마을·SK머티리얼즈, 지혜모아 화합관 설립

필두마을 전경
소백산야생화원

가흥2동 필두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서천교 건너 제일고-서부삼거리를 지나 나무고개를 넘는다. 나무고개교차로에서 안정방향으로 500m가량 가다보면 비행장 진입 직전 좌측 방향에 마을길 진입로가 보인다. 좌회전하여 「상줄동(필두)·필두가(弼頭街,필두길)」라고 쓴 표지판을 따라 400여m 들어가면 필두마을이다. 가는 길에 SK머티리얼즈 입구와 소백산야생화원 앞을 지난다. 지난달 31일 필두에 갔다. 이날 필두마을·SK 화합관에서 박성준 통장, 황무웅 노인회장, 왕용섭 전 노인회장, 김기년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필두마을
영주는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에 속했고, 통일신라 때는 내령군(奈靈郡)이 됐다. 고려 때는 강주(剛州)-순안(順安)-지영주사(知榮州事)로 부르다가 조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필두 지역은 영천군 가흥리(可興里) 줄배방(茁排坊)에 속했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가흥면 줄배리에 속했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는 줄배리가 상줄동(上茁洞)과 하줄동(下茁洞)으로 분리되면서 경상북도 영천군 가흥면 하줄동(下茁洞,필두)으로 독립마을이 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상줄동과 하줄동이 통합되면서 영주군 영주면 상줄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40년 영주읍 상줄리에 속하고, 1980년 시 승격으로 영주시 가흥2동에 속했다가 1995년 통합 영주시 가흥2동 6통(필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성준(63) 통장은 “필두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주시 가흥2동 6통(행정동)이지만 호적이나 재산관계서류는 영주시 상줄동(법정동)으로 표기(表記)하고 있다”며 “1960년대는 7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20가구에 280명이 사는 큰 마을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지명유래
필두마을은 조선 때 가흥면 줄배방이라 했다. 당시 가흥면은 읍치 서쪽에 있었던 면으로 지금의 가흥1,2동을 말한다. 가흥면(可興面)의 ‘가흥’이란 지명은 조선의 행정구역을 군면리(郡面里)로 정비할 때 이 지역 선비들이 모여 ‘가흥’이라 이름 지었다. 가흥(可興)의 ‘가’는 옳을 가(可)자로 미래의 가능성을 뜻하고, ‘흥’은 흥할 흥(興)자로 ‘번성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가흥이란 ‘미래에 크게 번성한다’는 뜻이다. 지금 영주는 가흥동 지역이 크게 흥(興)하고 있으니 앞날을 내다본 선조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딱 들어맞은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또 줄배방의 줄배란 풀 줄(茁)자에 밀칠 배(排)자를 써 줄배(茁排)라 했다. 즉 ‘풀을 밀치고 마을을 개척했다’는 뜻이다. 다음은 ‘필두’의 유래를 문헌에서 찾아봤다. 1984년에 발간된 경북지명유래 총람에는 필두(筆頭) 또는 필대(弼台)라 했고, 2010년에 나온 영주시사에는 필대(筆帶), 가흥2동 홈페이지에는 필대(弼臺)로 썼다. 왕용섭(80) 전 노인회장은 “예전에 이 마을에 안동권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안동김씨, 순흥안씨, 평해황씨가 차례로 들어와 살았는데 4성(姓)이 머리를 모아 서로 도우며 잘 살자는 뜻으로 도울 필(弼)자에 머리 두(頭)자를 써 필두(弼頭)라 했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며 “필두는 지혜를 모으고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잘 살아보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형성과 발전
이 마을 왕문섭(84) 어르신은 “이 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1800년대) 안동권씨로부터 비롯됐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없다”고 했다. 영주의 안동권씨는 고려 충신 권정의 둘째 아들 권요(權曜,1379-1460)가 영주로 피난 와서 민(여흥민씨) 생원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 세거하게 됐다. 그의 후손들은 영주 구성산 아래(城底)를 중심으로 뒤새, 사례 등지에 살았는데 그 한 가닥이 1800년경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여 진다. 안동권씨가 입향하고 얼마 후 안동김씨가 입향했다고 한다. 김기년(87,안동김) 어르신은 “필두의 안동김가는 삼당공파(三塘公派,12세) 파조인 영(瑛) 선조의 후손”이라며 “저의 고조부께서 이곳에 터를 잡으셨으니 그 때가 185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 후 순흥안씨와 평해황씨 일족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4성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필두농악과 안승하 선생
송지향 선생의 향토지에 보면 「우리고장의 농악으로는 새내(단산면 사천리)농악을 일컬어 왔으나 요즈음에는 그 맥이 거의 끊어진 상태이고 근년에는 필두농악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일찍부터 농악을 연구하고, 몸소 상쇠를 맡아 필두농악을 지도하고 있는 안승하 선생은 관내 여러 초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그가 재직하는 학교마다 농악부를 두어 지도하는 등 농악육성에 이바지해 오고 있다」고 썼다.

황무웅(74) 노인회장은 “당시(1980경) 마을에는 농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성했다”며 “1980년 영주시승격기념일 날 우리 필두농악대(지도 안승하)가 영주공설운동장에서 축하공연을 했다”며 “또 안 선생에 의해 재현된 영주지신밟기는 1983년 6월 경상북도 전통민속으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화합관 내 운동시설
필두마을·SK 화합관

필두·SK 화합관
마을 표석에서 왼쪽 길로 50여m 올라가면 길 우측에 필두마을·SK머티리얼즈 화합관이 나온다. 필두와 SK가 ‘지혜를 모아 서로 돕고 잘 살자’는 뜻에서 2016년 화합관을 설립했다.

박성준 통장은 “우리 마을 선대(先代)들은 머리를 모아 서로 돕고 잘 살자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필두(弼頭)라 했고, 지금은 필두마을과 SK머티리얼즈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 화합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이 마을 강병갑(74)씨는 “마을회관 화합관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마을회관”이라며 “건평 63평에 거실은 교실보다 넓고, 주방 시설과 화장실은 최첨단이다. 또 어르신들이 운동할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가 잘 갖춰져 있다”고 말했다. SK머티리얼즈는 IT 소재산업을 선도하는 세계 최고의 종합소재회사로 자율주행차, 반도체,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등의 핵심소재를 생산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권순분, 권필녀, 김성자, 김태순 씨
필두마을의 상징 소나무
필두의 저녁종
김해김씨家 유물
필두마을 사람들

필두마을 사람들
필두마을은 산을 등지고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앞은 들(논)이고 그 앞에 서천이 흐른다. 이 마을 박병두(74) 씨가 말하기를 “김규태 어르신댁에 가면 진품명품에 나가도 될 옛 교지와 문집 등 보물이 있다”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 집에 갔다. 김규태(81) 어르신은 “저의 문중은 김해김씨 대제학파로 안동에 살다가 증조부(金宅俊)께서 영주면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저의 조부대부터 영주에 살게 됐다”며 “고조부, 증조부께서 받은 칙명(勅命) 등 문적을 보물로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진옥(64) 부녀회총무는 “어버이날은 마을사람들 모두 화합관에 모여 경로연을 연다”면서 “마을부녀회가 어르신 80여명을 모시고 여는 이날 잔치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라고 했다. 강 건너 창부에서 17살 때 필두 경주이씨家로 시집왔다는 문후녀(81) 할머니는 “당시 어려서 어떻게 시집왔는지 잘 모르겠다”며 “집은 모두 초가집이고 집들이 산비탈에 옹기종기 붙어있었다”고 말했다. 마을 복판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계신다는 황화자(79) 씨는 “오래전부터 가게를 열어왔고, 담배포도 있어 힘자라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다”며 “좋은 친구들과 친교하고 함께 지내는 게 제일 즐겁다”고 말했다. 작년에 필두로 이사 왔다는 양화자(79) 씨는 “마을 사람들 모두 화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마을을 위해 애쓰시는 통장님, 노인회장님, 부녀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어제도 화합관에서 보건건강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산과 들과 내가 있어 참 좋다는 김정순(79) 씨는 “마을 입구에 있는 소나무 숲은 마을의 보물이고 자랑”이라며 “마을 풍광이 좋아 해마다 뒷산 중턱에 좋은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이튿날도 마을에 갔다. 마을 앞 비행장광장에서 김기년(87)·정옥순(83) 노부부를 만났다. 딸 둘 아들 다섯을 잘 키워 내 놓은 훌륭한 어버이시다. 늦은 오후 그늘에서 쉬고 계신 두 분의 모습은 밀레의 저녁종처럼 진정한 평화를 느낀다. 기자가 “120세까지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렸더니 환한 미소로 답하셨다.

박성준 통장
황무웅 노인회장
왕용섭 전 노인회장
김기년 어르신
왕문섭 어르신
정옥순 할머니
김규태 어르신
문후녀 할머니
김정순 씨
황화자 씨
강병갑 씨
박병두 씨
신진옥 부녀회 총무
양화자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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