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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82] 가흥2동 ‘창보’

고려 때 설치한 창보역에서 유래한 마을 ‘창보(昌保)’

2018. 01. 16 by 영주시민신문

하늘의 빛(天光) 땅의 후덕(地德)이 가득한 마을
넓은 들이 마을의 상징, 지금 농촌건강장수마을

창보마을전경

가흥2동 창보마을 가는 길
시내 서천교사거리에서 서천교를 건너고, 서부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창진방향으로 간다. 남원천 창진교를 건너자마자 중앙선 철도건널목을 건너 12시 방향으로 보이는 마을이 창보이다. 구랍 30일 창보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류철하 통장, 이복호 노인회장, 김정자 전 부녀회장, 강수원 총무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청보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표석

역사 속의 창보(昌保)
기원전 10-8세기 청동기 유적이 2012년 마을 앞 율평들(창보-나무고개사이)에서 발굴됐다. 이 생활 유적은 남한강 청동기문화가 소백산을 넘어 이곳에 첫 생활유적을 남겼다고 하니 창보는 역사적·지리적으로 의미가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는 영주는 고구려의 날이군(捺已郡), 통일신라 때는 나령군(奈靈郡), 창보역이 설치되던 고려 때는 강주(剛州)라 부르다가 조선 초 태종 임금 때(1413년)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조선 중기(1600-1700) 무렵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할 때 영천군 망궐리(望闕里) 삼진방(三津坊)이라 불렀고, 1800년경 면리(面里)로 바꿀 때 망궐면 삼진리가 됐다.
당시 창보역에는 역리(驛吏)들만 살았고, 마을은 서늘기와 용두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창보역이 폐지되면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망궐면 창보동(昌保洞)이 탄생하게 됐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전면 개편했는데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하고, 영천군 망궐면의 창보동과 삼진동을 창진리로 통합하여 영주군 영주면에 편입시켰다.
1940년 영주읍 창진리,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가흥2동에 편입됐고, 1995년 통합 영주시 가흥2동 4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고려사 참역(站驛) 편에 보면, 고려(성종, 981-997) 때 개성 남경 평구역(平丘驛)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광주-원주-제천-단양-영주-안동-봉화로 이어지는 도로를 ‘평구도’라 했다. 평구도 관할역에 흥주(옛순흥)의 창락역, 강주(옛영주)의 평은역·창보역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창보’라는 지명은 천 년 전 고려 때부터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창진이란 지명은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합할 때 창보(昌保)의 창(昌)자와 삼진(三津)의 진(津)자를 조합하여 창진(昌津)이라 했다. 창보마을 북서쪽에 용두마을이 있다. 이 마을 앞 냇가에 집채만한 바위에 용암동천(龍巖洞天), 복용대(伏龍臺)라고 새긴 바위글씨(연대1700-1800추정)가 있다. 조선 때 이곳에 살던 함창김씨·안동권씨 등 여러 선비들이 이곳을 용두(龍頭)로, 석벽산(石壁山)을 용목·용등으로, 재꼭목지를 용미(龍尾)로 하여 신성시(神聖視) 여겼다고 한다. 강수원(69) 총무는 “옛 선비들은 경치가 빼어난 곳에 ○○동천(洞天)을 새기고 자신들의 마을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마을 선비들 또한 ‘용암동천’이라 새기고 천하명당임을 뽑냈는데, 지금 2자(天岩)는 땅에 묻히고 「洞龍」 2자만 보인다”며 “또 복용대를 용두(龍頭)로 산줄기가 석벽산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1938년 중앙선 철도공사로 끊어졌다”고 말했다.

창보역(마장터)

창보역(昌保驛)의 역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창보역(昌保驛)은 고려시대 평구도(平丘道) 소속이었으나, 조선시대 창락도(昌樂道) 소속 역(驛)으로 편제됐다. 군(郡)에서 서쪽으로 9리(약3.5㎞)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고 기록했다. 창보역은 고려 때는 강주(剛州)의 역, 조선 때는 영천군의 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창보역 대마 1필, 중마 3필, 복마 10필, 역리 26명, 역노 10명, 역비 3명이 배속되어 있다」고 기록했다. 또 「창보역은 한양으로부터 죽령을 넘어 안동이나 봉화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했다. 창보역 서쪽으로는 순흥 창락역, 북쪽으로는 순흥 죽동역, 동남쪽에는 영천 평은역, 서남쪽에는 안동 유동역 등과 연결됐다. 1896년(고종33) 대한제국 칙령 제9호에 의거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창보역도 폐지됐다」라고 적었다. 이목영(81) 전 노인회장은 “옛날 창보역에서 말을 키우던 마장(馬場) 터가 마을 앞 중앙선 철길 옆에 둔덕으로 남아 있었으나, 2016년 농지정리 때 흔적이 사라져 아쉽다”며 “시와 협의하여 ‘마장터’ 표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광하림(天光下臨)의 명당
세 갈래 물줄기가 만나는 이곳 창보는 넓은 들이 있고, 물이 풍부하여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니 ‘하늘이 내려준 명당이 맞다’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회관 앞 노인정신축기념비에 「천광하림 지덕상재(天光下臨 地德上載)」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문무대왕 해도릉묘문(827년) 원효·의상 합동기(海島金印章)에 나오는 문구(文句)로 ‘하늘의 빛이 내리고 땅의 후덕함이 가득하다’라는 뜻인데 ‘천하명당’을 말할 때 쓰는 구절이라고 한다. 뒷면에는 “전통 윤리에서 첫째는 오륜이고, 그 중에 제일은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회원 일동이 인화협동(人和協同)하여 천연극락(天然極樂)의 사옥을 건립한 업적을 여기 남긴다. 회장 김종원, 총무 장성오. 1994」라고 썼다.

류철하(61) 통장은 “당시 이 마을의 선비 황우섭(黃佑燮,1923-2007) 선생께서 직접 비문을 쓰셨다”며 “선생께서는 한학자로 주역(周易)에 밝으셨으며, 유림에서도 명망이 높으셨다”고 말했다. 이복호(80) 노인회장은 “창보노인회는 붕우유신의 예와 인화협동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마을”이라며 “우리 후대들 또한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또 어르신들의 건강장수를 위해 애쓰시는 류철하 통장님, 김정자 전 부녀회장님 그리고 부녀회, 청년회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농촌건강장수마을

건강장수마을 ‘창보’
마을 초입에 ‘농촌건강장수마을’이란 대형 간판이 있다. 류철하 통장은 “시(市) 지역 경북1호로 건강장수마을에 선정되어 2016-17년 2년간 운영했다”면서 “주요활동 내용은 건강활동으로 건강체조·게이트볼·등산, 학습활동으로 풍물·한지·치매·그림·염색·벽화, 소득사업으로 압화·찰흑미생산·감자재배·두부제조 등 모든 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건강하고 건전한 장수문화 조성에 기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홍종태 어르신
정봉학 어르신

전봉학(85) 어르신은 “우리마을을 장수마을이라고 한 것은 영주의 최고령 홍종태(104세) 어르신이 우리마을에 계시고, 90세 이상 어르신이 6분 계시기 때문”이라며 “홍 어르신은 하루 2번씩 노인정에 나오셨고, 매일 자전거로 풍기까지 왕복할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지난해 11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지금 장수한방병원에 입원 중”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창보노인회 양옥자(70) 씨는 회관 앞 벽화그림을 가리키며 “이 벽화는 모두 노인회원들이 그린 벽화”라면서 “압화스탠드 만들기와 찰흑미·감자 재배 수익 등으로 인재육성장학금 100만원을 기탁했다”고 말했다.

무술년 석벽산해맞이
창보마을 사람들
류철하 통장
이복호 노인회장
김목영 전 노인회장
김제열 할머니
조임이 노인회부회장
강수원 노인회총무
김정자 동 부녀회장
양옥자 씨
김점자 씨
이창희 씨

창보마을 사람들
창보마을회관은 멀티미디어 시설이 잘 갖춰진 공부방이다. 벽장에는 농악기 등 건강장수 학습자료들로 꽉차있다. 김정자(65) 전 부녀회장(가흥2동부녀회장, 전 영주시생활개선연합회장)은 “창보풍물단은 동(洞)을 대표하여 시민체전에 참가하였고, 인삼축제에 나가 공연도 했다”며 “이를 통해 인화협동, 붕우유신, 건강장수 등 1석 3조의 효과를 거둬 더욱 후덕(厚德)한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김제열(80) 할머니는 “창보는 선대(先代)로부터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다”며 “지금은 이복호 노인회장님과 강수원 총무님, 류 통장님, 김 부녀회장님께서 애쓰신 덕분에 장수건강 선진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조임이(77) 노인회부회장은 “창보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각계각층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며 “특히 하림 송영근 사장님은 마을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 주신다. 또 전봉학 어르신의 아들 전재원(자동차부품업체사장) 씨는 효도관광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밥 먹다 이밥 먹으러 유동에서 창보로 시집왔다는 김점자(70)씨는 “예전에는 길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며 “1970년 초 구식결혼식을 하고 신행 올 때 택시가 다리도 없는 빙판길로 남원천을 건너 왔고, 혼수는 경운기 2대에 싣고 왔는데, 당시는 경운기가 마을에 1대밖에 없어 1대는 빌렸다”고 했다.

안숙희의 고구마 가방과 저울

고구마가방과 저울을 들고 나온 안숙희(76) 씨는 “창보는 고구마농사가 잘 되는 마을이었다”며 “예전에 보릿고개 때 고구마를 내다 팔기 위해 집집마다 전깃줄가방과 저울이 있었다”고 말했다.

노인회 막내 이창희(68) 씨는 “우리마을은 해마다 1월 1일날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석벽산 해맞이 행사를 연다”면서 “행사 후 회관에 모두 모여 떡국 먹는데, 안동국 가흥2동장님도 오신다고 하니 기자님도 꼭 오시라”고 했다. 석벽산(278m)은 영주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멀리 (예고개) 봉수산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어 해맞이 장소로 영주 으뜸이다. 기자도 무술(戊戌) 첫날 창보경로당에서 해맞이 떡국을 먹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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