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충효(忠孝)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 ‘생고개’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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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45]안정면 생현2리 ‘생고개·소리골·큰골’

충효(忠孝)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 ‘생고개’

2017. 04. 20 by 영주시민신문
생고개 마을전경

효자 이윤정의 정려각·이현구 선생의 순절비
어른을 섬기고 협동·화합하는 살기 좋은 마을

생고개 가는 길

안정면 생고개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나무고개를 넘어 안정면소재지로 간다. 안정면사무소 앞에서 용암산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500여m 가다보면 집들이 보이고 도로 우측에 ‘생현2리→’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신전3리)서 우회전하여 500m 가량 올라가면 ‘큰골’ 마을이고, 다시 500m 정도 올라가면 ‘소리골’, 또 500m쯤 올라가면 충효의 마을 ‘생고개’다. 지난 2일 생현2리에 갔다. 이날 마을 회관에서 우병선 이장, 권무남 노인회장, 권기순 부녀회장, 방인화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과 전설을 듣고 왔다.

소리골 마을 전경

역사 속의 생고개

생현리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기천현(基川縣. 풍기의 옛 이름)에 속했다. 1414년 문종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묻으면서 은풍(殷豊)과 기천(基川) 두 고을의 이름을 따 풍기(豊基)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생고개면(生古介面) 생현리(생峴里.생고개)와 송동리(松洞里.소리골)가 됐다. 그 후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될 때 풍기군 생고개면(生古介面)이 생현면(生峴面)으로 개칭되면서 생현동(生峴洞)과 송동(松洞)으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대대적으로 행정구역 개편할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생현면의 생현동과 송동은 생현리로 통합되어 안정면(安定面)에 편입 됐다가 해방 후 생현2리가 됐다. 우병선(69) 이장은 “생현2리는 생고개, 소리골, 큰골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며 “모두 40여 가구에 80여명이 산다”고 말했다.

큰골 마을전경

지명 유래

생현의 옛 이름은 ‘생고개’다. 풍기지에 보면 생고개면(生古介面) 생현리(생峴里)라고 나온다. 마을 원로 권태운(80) 어르신께 ‘生古介’의 유래를 여쭈니, 어르신께서 “고개는 순수한 우리말인데 억지로 한자를 붙이니 ‘古介’가 됐다”며 “생고개(生古介)는 봉암으로 넘어가는 옛 고개 이름”이라고 말했다. 집에 와서 한자 자전(字典)에 보니 고개(古介)는 ‘현(峴), 재(岾), 치(峙)와 같은 뜻’이라고 되어 있다. 

생현리(생峴里)의 ‘생현’이라는 지명은 장승 생 자를 쓴 것으로 봐서 고갯마루에 있던 장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 진다. 또 소리골 마을은 예전에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곡(松谷)’이라 부르다가 소리골이 됐고, 큰골은 마을 앞에 골이 크다고 하여 큰골이 됐다고 전해진다. 생고개 밑에 사는 임정희 할머니는 “예전에 여륵, 대룡산 사람들이 생고개를 넘어 풍기장 다녔다”며 “고갯마루에 장승이 있었고, 회나무 자리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말했다.

생고개 회나무

진성이씨 500년 세거지

진성이씨(시조 李碩)가 생현에 입향한 것은 조선 초로 추정된다.

진성이씨 윤정사록(允貞事錄)에 의하면 「효자 윤정(允貞)공의 아버지 여담(如聃) 선조께서 풍산현 망천에 살다가 풍기군 생현으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마련했다」고 기록했다.

여담의 생몰(生沒)을 알 수 없어 퇴계와 관계를 따져보니 여담은 시조의 5세손이고 윤정은 6세손, 퇴계(1501-1570) 선생은 7세손이므로 여담의 생현 입향은 145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생현의 진성이씨는 「시조 이석(1세)-장남 자수(子修.2세.고려공신)-장남 운구(云具.3세.공조참의)-2남 양검(養儉.4세.합천군수)-차남 여담(如聃.5세.정랑)-차남 윤정(允貞.6세.別侍衛)」으로 세계가 이어졌다. 이후 윤정의 후손들이 생현에 세거하여 생현파가 됐다.

권무남(78) 노인회장은 “효자 윤정의 후손들이 생현에 500여년 세거해 오다가 일제 말 무렵 타 지역으로 이거했다”며 “해마다 동짓날이면 종중이 효덕사(사당)에 모여 향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효자 이윤정 정려각

이윤정의 효행

주세붕은 풍기속상기(豊基俗尙記)에서 “윤정의 효행은 하늘이 낳은 것이니, 99세까지 조석으로 선묘를 배알함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라고 했다.

윤정의 정려문(旌閭文)에는 “천성이 순효하여 어버이 섬김에 정성을 다했다. 6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할 때 한 번도 집에 내려온 일이 없고, 80이 넘도록 선령묘소를 배알함에 비록 비바람에도 그만 둔 일이 없다”고 적었다. 효자 윤정의 사록(事錄)에 의하면 「병오년(1546)에 이윤정 효자각과 효덕사(별묘)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퇴계 선생은 1520년 족숙 윤정(允貞)으로부터 선대 송안군(松安君.2세)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라는 대목과 「1549 풍기군수로 재임 시 윤정공의 아들 균(均)으로부터 선대의 문적을 제공받았다」라는 대목에서 퇴계와 족숙인 윤정공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현구 선생 순절비

이현구 선생 순절비

윤정공 정려각에서 동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독립운동가 혜인 이현구(兮人 李賢求)선생의 순절비가 있다. 이현구(1862~1940) 선생은 퇴계의 14대 손으로 일제 때 독립투사였다. 경술국치(1910)와 창씨개명 등으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조상님이 물려주신 이름석자마저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며 패랭이를 쓰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 후 영주 안정 생현리에 머물러 있다가 끝내 죽기를 결심하고 36일간의 단식 끝에 1940년 9월 7일 순국했다.

선생이 순국한 지 30년이 흐른 뒤인 지난 1970년에 후손들에 의해 순절비가 세워졌으나 마을 진입로 확장 등으로 축대가 크게 훼손돼 선생의 증손자(대규)를 주축으로 생현유계회(회장 김석기)를 결성하고 2013년 비를 이전 준공했다. 우병선 이장은 “혜인 선생은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항일 항쟁에 앞장섰던 분”이라며 “우리마을 생현은 충효학습장”이라고 말했다.

옛 망전산 봉수 터

삼국 때 고분, 조선 때 봉수

생고개 마을 앞산에는 조선 때 봉수가 있고, 마을 뒤 용암산 줄기에는 삼국 때 고분군이 있다. 이 마을 권태운 어르신은 “생현 서북편 용암산에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고분 200여기가 있고 옛 성터도 있다”며 “예로부터 이 지역에 강력한 부족국가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박무남(76) 씨와 생고개 앞산 봉수(烽燧)에 올랐다. 박 씨는 “이 봉수는 조선 때 풍기 망전산(望前山) 봉수”라며 “이 봉수는 북으로는 죽령산 봉수에 응하고 동으로는 영천군 성내산(城內山.장수고개)봉수, 남으로는 창팔래산(昌八來山.이산 두월)봉수, 예안 녹전산(祿轉山.예고개)봉수에 응했다”고 말했다.

생현2리 사람들

생현2리 사람들

기자가 생고개에 갔던 그 다음날(4.3) 생현2리 사람들은 포항으로 봄소풍을 간다고 했다. 권기순(58) 부녀회장은 “내일 소풍 갈 장보기를 해 왔다”면서 “우리 마을은 서로 다른 성씨들이 모여 살지만 마을 일에 솔선수범하고 화합하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이영순(77) 씨는 “우병선 이장님의 주선으로 포항으로 봄나들이를 가게 됐다”며 “우리마을 사람들은 마을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어려움이 있을 때는 서로 잘 돕는다”고 말했다.

박창섭(82) 어르신은 “마을 행사 때마다 우병선 이장과 권기순 부녀회장의 수고가 참 많다”며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충효예가 남다르고, 집집마다 자녀들마다 효성이 지극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마을회관

우병선 이장은 “우리마을 권태운 어르신의 부친 故 인국(仁國) 선생께서는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조모를 10여년동안 지극히 봉양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며 “주민들의 추천으로 영주시로부터 효행상(1980년)을 받으셨다”고 말했다.

박공훈(74) 씨는 “생현2리는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벼농사 중심 농업이 발달했다”면서 “친환경농법(저농약·저비료)으로 윤기 자르르 흐르는 맛좋은 쌀을 생산하여 도시로 보낸다”고 말했다. 방인화(66) 새마을지도자는 “생현2리는 축사 없는 청정마을”이라며 “부녀회와 폐비닐 수거, 농약병 수거 등에 적극 협력하여 깨끗한 마을이 됐다”고 자랑했다. 생고개 마을은 아직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이지만 근본이 바로 선 마을이다.

이원식 시민기자

<안정면 생현2리 마을사람들>
 

우병선 이장
권무남 노인회장

 

권기순 부녀회장
방인화 새마을지도자

 

임정희 할머니
박창섭 어르신

 

권태운 어르신
이영순 씨

 

박무남 씨
박공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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