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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29]평은면 천본2리(망월)

「옥토망월형」 살기 좋은 마을 ‘망월동’

2016. 12. 19 by 영주시민신문
▲ 망월마을 전경
▲ 망월 사람들

월리동천(月里洞天) 지산북안(芝山北岸)
충주석씨 사성(斯珹) 후손 500년 세거지

천본2리 망월동 가는 길
망월동은 내성천 건너 이산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영주, 안동, 봉화 삼군 경계 지점에 있다.

영주시내에서 문수방향으로 가다가 적서교차로에서 경북대로를 타고 안동·평은방향으로 간다. 내성천교를 건너자마자 평은면사무소·평은리 방향으로 내려 천상로를 따라 원천리·천본리 방향으로 간다. 영지산 북편방향 오르막길을 올라 ‘평은고개(해발310m)’를 넘어 500여m 가량 내려가면 산중도방(山中道傍)에 유문(儒門)을 이룬 망월동을 만나게 된다.

지난 3일 망월동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석도진 이장, 석상원 노인회장, 석신진 새마을지도자, 염문자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월리동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속의 망월동
평은면 천본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천군(榮川郡) 천상면(川上面)에 속했다. 조선말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영천군 천상면 망월동이 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영천군의 천상면과 진혈면(금광, 놋점, 송평, 섬계)을 병합하여 ‘평은면’이라 칭했다.

당시 면의 이름을 평은면이라 한 것은 저명한 평은역이 있었던 연혁에 따랐다고 한다. 또한 천상면의 본리(本里.멀래), 말천동(末川洞.내매), 망월동(望月洞), 오천동(汚川洞.외두들)을 합하여 평은면 ‘천본리’에 편입했다. ‘천본’이란 말천(末川)의 천(川)자와 본리(本里)의 본(本)자를 따 ‘천본리’라 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영풍군 평은면 천본2리, 1995년 영주시 평은면 천본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 유래
평은리에서 망월로 가는 도로명이 ‘천상로’다. ‘천상’이란 옛 영천고을의 동쪽 내성천 상류에 있는 지역이라 하여 ‘천상면(川上面)’이 됐다. 지금 마을 이름은 ‘망월(望月)’이다. 예전에 선조들은 월리(月里)라고 바위에 새겨놓았다. 마을이름을 월리 또는 망월이라 한 것은 풍수지리설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옥토망월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옥토끼가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말한다. 석도진 이장은 “마을 뒷산에 올라 보면 150평가량 되는 ‘망월터’가 있고, 어릴 적 영지산 쪽에서 뜨는 보름달을 보면서 ‘망월이야’를 외치곤 했다”고 말했다. 석근수(81) 어르신은 “마을이름을 ‘망월’이라고 한 것은 ‘옥토망월형에서 유래됐다’고 선대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 석대균(68)씨는 “정월보름날 짚단으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 뒷산에 올라가 달맞이를 했다”며 “달이 뜨기 전에는 소깝불을 지피고 쥐불놀이를 하다가 달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달을 본 사람이 ‘망월이야!’라고 외치면 모두 ‘망월이야!’를 외친 후 절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말했다.

충주석씨 500년 세거지
망월은 충주석씨 500년 세거지다. 망월의 충주석씨는 시조 석린(石隣)의 11세손 사성(斯珹)의 후손들이다. 사성은 통덕랑(通德郎) 벼슬을 지냈으며, 1450년경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충주에서 옛 영천군 평은리로 이거하여 영주 입향조가 됐다.

이 마을 석명진(87) 어르신은 “사성 선조께서는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남 경(璟)의 후손은 평은리에 뿌리내렸고, 차남 규(奎)의 후손은 망월에, 3남 구(球)의 후손은 상주로 이거했다”며 “망월에 터 잡은 규 선조는 마을을 개척하고 농토를 마련하여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후손 석상원 노인회장은 “규 선조께서 평은리에서 망월로 이거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후 상황을 살펴 볼 때 입향 시기는 155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마을 앞 동구에는 입향조 석규(石奎)가 심었다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이는 충주석씨 500년 세거지의 증표다.

 

▲ 월리동천 바위글씨

월리동천(月里洞天)
‘동천(洞天)’이란, 마을이 산(山)과 내(川)로 둘러싸여 경치가 빼어나고, 유학을 중시하는 ‘살기좋은마을’이란 뜻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동구(洞口) 바위에 동천을 새기고 마을의 자랑으로 삼았다. 영주에는 동천이 16개소에 있는데 모두 유문을 일으킨 선비의 마을이다. 망월 동구에 「월리동천(月里洞天) 지산북안(芝山北岸) 석문각(石門刻)」이란 바위글씨가 있다.

어르신들께 “글씨의 뜻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더니 석근수 어르신은 “이 바위글씨는 예전에 선조들이 새긴 글씨로 마을 표지판과 같은 것”이라며 “월리동천 지산북안이란, 영지산 북쪽언덕에 있는 월리는 ‘살기좋은마을’이란 뜻”이라고 말했다.

▲ 망월휴원의 500년 수령 느티나무

또 느티나무 옆 바위에는 「천년지월(千年芝月) 만세예석(萬世芮石)」이란 글귀도 있다. 마을 어르신들은 “전해 오는 내력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지월’은 영지산 북쪽마을 ‘월리(망월의 옛 이름)’를 뜻하고, ‘천년만세예석’은 청주석씨 가문이 천년만세동안 번성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산중도방(山中道傍)
망월은 영주시내에서 직선거리 10km 지점에 있지만, 마을 서쪽으로는 내성천이, 북동쪽은 토일천이 감싸고, 남서쪽으로는 영지산이 가로막고 있어 철옹성 같은 피난지다. 망월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유학을 장려하고, 일찍 기독교를 도입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산중도방(山中道傍)이라고 한다.

18살 때 봉화 원둔에서 시집왔다는 박병옥(87) 할머니는 “가마길이 너무 험해 가마꾼에게 미안했다”며 “평지는 타고 오르막은 걷고, 산 따라 물 건너 시집오는 길이 험준했다”고 말했다.

망월휴원 옆 느티나무집에 신수명(66)씨 부부가 산다. 신씨는 콩 타작을 하고, 부인은 도토리묵을 짠다. 부인은 “여기는 하늘아래 첫 동네 오지마을이라서 의식주는 자급자족으로 살아왔다”며 “1980년까지 지게길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석도진(55) 이장은 “천본리 지역은 사람들의 왕래가 드물고 외진 곳이라 발전이 늦고 문화혜택이 더딘 오지”라며 “전기는 79년에 들어왔고, 전화는 90년에, 98년에 도로가 포장되고 버스는 2005년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망월마을 사람들
이날 오후 2시 마을회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석 이장이 미리 알려서인지 20여명이나 모였다. 기자가 왔다고 박수로 환영해 주기도 했다.

석도진 이장은 “천본2리는 자연부락으로 망월과 내매가 있었는데 내매는 영주댐 수몰로 마을이 없어졌다”면서 “망월은 현재 28가구에 50여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마을 앞에 망월예배당이 있다. 신도 18명의 작은 교회다. 이 교회 석상원 장로는 “망월교회는, 110년전 건립된 내매교회의 영향을 받아 1951년 개척됐다”면서 “1960년대에는 성도 100명(아동포함)의 큰 교회로 성장했었다. 교회 건물은 3차례 중수 후 현재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석신진(59) 새마을 지도자는 “1960년대 교회 전도사님의 권유로 사과 농사가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고추, 수박, 콩 등 밭농사 위주의 농업으로 변했다”며 “수박은 5톤 트럭 50차, 고추는 10만근 정도 생산한다”고 말했다.

강숙희(85) 할머니는 “오지마을의 보릿고개는 더 심했다”고 하면서 “지난 60년동안 세상이 엄청 변하고 발전했다”고 말했다. 강정자(77)씨는 “예전에 도랑가 우물에서 물을 이고 벤달길을 오르내리느라 골병들었다”며 “지금은 상수도에 가스에 참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염문자(64) 부녀회장은 “우리 마을 역시 젊은 사람은 없고 7-80대 어르신들만 사는 마을”이라며 “전에는 소득 높은 작물 중심 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힘이 적게 드는 콩, 고추농사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문수 다락골에 살다가 수년전 망월로 이사 왔다는 백윤흠(74)씨는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서 살고 싶은 곳 어디라도 가서 살 수 있다”며 “망월은 인심좋고, 편안하고, 화목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오후 4시경 회관을 나와 석도진 이장, 석근수 어르신과 마을을 둘러봤다. 집들은 소쿠리형 골짝에 아랫집 윗집이 정답다. 우물, 디딜방아, 마굿간이 있는 옛집도 보이고, 수백년 수령의 밤나무도 있다. 마을 뒤 언덕에 월포정(月圃亭)이란 정자가 있다.

조선말 참봉 벼슬을 지낸 월포(月圃) 석운환(石雲煥, 석명진 어르신의 조부)선생이 후진양성을 위해 멀래방향 구렁에 건립했는데, 6·25 때 빨갱이들이 득실거려 사변 후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한다. 월포정에서 영지산을 바라보니 옥토끼가 보름달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보인다. ‘아, 옥토망월형이란 바로 이거로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이원식 시민기자

▲ 석대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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