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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25]부석면 북지2리(방골·허뭇거리)

아름다운 부석사 곁에 있는 마을 ‘방골·허뭇거리’

2016. 11. 17 by 영주시민신문

▲ 방골마을 전경
부석사 창건 전부터 있었던 마을 ‘방동’
인동장씨 200년 세거지 ‘허뭇거리’

방골·허뭇거리 가는 길
부석면 북지2리 방골·허뭇거리 마을은 부석사 곁에 있는 마을이다. 부석사 가는 길은 봉화통로 상망교차로에서 보름골-진우-상석-부석으로 가는 길이 있고, 서천교 사거리에서 장수고개-동촌-사천-단산을 거쳐 부석으로 가는 길이 있다.

1970년 이전에는 풍기-순흥-단산-부석으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부석면소재지에서 은행나무길을 지나 부석사 주차장 가까이에 이르면 북지2리 표지판이 나온다. 북지2리는 “멋스러운 부석사를 곁에 두고 있는 마을”이라며 “여기서 나는 ‘부석사 사과’는 가장 야무지고, 꿀이 많이 들어있는 사과”라고 소개하고 있다.

지난 7일 오전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분수대 물보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부석사 식당에서 장세호 이장, 이창은 노인회장, 박찬한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부석사의 전설과 지명유래를 듣고 왔다.

▲ 허뭇거리마을 전경
역사 속의 방동·허뭇거리
조선조 이전에는 면동리 행정구역에 대한 기록이 없다. 조선 초 1413년(태종13년)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부석사 지역은 순흥도호부 삼부석면(三浮石面)에 속한 마을(坊)이었다.

1849년에 편집된 순흥지(順興誌)에 삼부석면 ‘방동(方洞, 방골)’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당시 삼부석면에는 방동, 임곡(숲실), 대율곡(한밤실), 사문단(사그랭이), 마흘천(남대리), 의풍 등이 있었는데 방동이 지금 방골이다.

그 후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도호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면서 삼부석면이 봉양면(鳳陽面)으로 개칭된다. 이 때 허뭇거리는 신기동에, 방동과 주차장 주변 마을은 북지리에 편입된다. ‘신기동’과 ‘북지리’라는 동명이 이때 생겼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하고, 봉양면, 용암면, 도강면을 부석면으로 통합한다. 이 때 방동, 허뭇거리, 송고, 갓띠 등은 북지리로 통합됐다.

▲ 신기리 표석
지명 유래
북지2리는 방동, 허뭇거리, 부석사장터 등 3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영주시사 지명유래편에 보면 ‘방동은 부석사 동편에 있는 마을로 부석사 전성기 때 승방(僧房)이 있는 동네라 하여 방동(房洞)이라 했다’라고 기록돼 있고, 순흥지에는 방동(方洞)이라고 기록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방골’이라고 부른다. “방골의 유래가 뭐냐?”고 물었더니 하건홍(68)씨는 “방구(바위)가 많아 ‘방골’이라 한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방구(돌)가 많은 마을이 맞다.

‘허뭇거리’마을은 부석사 초입에서 봉화 물야방향으로 300m 가량 가다가 도로 좌측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허문동천(虛門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글씨가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에 전통마을이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가보니 이 마을은 인동장씨 집성촌이다.

▲ 아름다운절집 부석사
허뭇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구휼과 적선’의 마을로 알려졌으나 걸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약탈과 행패가 심해지자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아예 없애고 동구(洞口)를 폐쇄하게 된다. 이런 연유로 ‘문이 없다’는 뜻을 가진 ‘허문(虛門)거리’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허뭇거리’로 굳어졌다.

그 뒤 질서가 잡힌 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신기리’라 명명했다. 이때가 구한말쯤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 사는 장세홍(69)씨는 “우리 인동장씨를 ‘허뭇거리장씨’라고도 하는데 해방 후에서 6·25무렵까지는 인근에 60여호가 살 정도로 후손이 번창했다“고 말했다. 주차장 주변 상가지역은 100여년전부터 방골, 허문, 갓띠, 송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송지향의 영주향토지에는 ‘삼부석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 부석사 특산물 판매장
부석사와 방동마을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676년)할 때 이미 이곳에 어떤 무리들이 은거하고 있었다 하니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천년하고도 수 백 년 전으로 추정된다.

방동마을에 오니 창건 당시 ‘부석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하다.
‘역사속의 부석사’ 초기편에 보면 ‘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방골에 살고 계신 신만례(92) 할머니는 “18살에 시집와서 74년동안 방골에서 살았다”며 “당시 돌과 흙으로 두꺼운 벽을 쌓아 지은 초가집은 기어들어갔다 기어나오는 집이었고, 나물 섞은 보리밥, 조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면서 당시 지극히 가난했던 생활상을 털어놓았다.

신 할머니께 “천년전 부석사가 처음 지어졌을 때도 초가집만 몇 채있었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그렇지! 예전 천년의 발전은 미미했으나 지금 70년의 발전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 방골 동수목
인동장씨 허뭇거리 입향
인동장씨(仁同張氏) 시조는 고려 때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 벼슬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다. 허뭇거리 인동장씨 남산파는 승록대부 영의정을 지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5대조이신 사천공(泗川公) 장우(張우, 남산파 분파조)의 후손이다. 남산파란 인동(구미시 인의동) 남산 밑에 살았다고 하여 ‘남산파’라 한다.

인동장씨 허뭇거리 입향 내력은 분파조의 고손자인 장훈이 임진왜란(1592년) 때 순흥부 물야면으로 피난 와서 압동리·두문리 일원에 터를 잡았다. 그 후 장훈의 7대손 수익(壽益)이 1790-1800년 무렵 순흥부 삼부석면 부석사 인근에 터를 잡으니 현 부석면 북지리 ‘허뭇거리’이다.

허뭇거리 출신 장세종(디센크루프 엘리베이터 코리아㈜ 경북지사장)씨는 “수익 선조께서 이곳에 자리 잡으시고 200여년동안 세거해 오면서 후손이 엄청 번창했다”면서 “허뭇거리 출신 저희 장가들은 ‘학문을 중시하라’는 선조님들의 뜻을 받들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각계각층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방골경로당
방골의 반남박씨들
방골의 반남박씨는 동원공(東元公) 승윤(朴承倫)의 후손들이다. 동원공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동생으로 소고와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글씨를 잘 써서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다. 동원공은 단산면 동원리에 터를 잡고 세거하여 호를 ‘동원’이라 했다.

방골에 사는 박찬한(60)씨는 “부석의 반남박씨는 판관공파 동원공의 후손으로 구한말 무렵 방골로 이주하여 100년 넘게 세거해 왔다”며 “1960년대까지는 2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나고 현재 10여 가구만 산다”고 했다.

▲ 방골 새마을주택
방골·허뭇거리 사람들
의상이 부석사 터를 잡은 후 “이곳은 고구려의 말발굽과 백제의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땅”이라며 “부처님의 힘으로 죽령을 지키고 신라를 방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부석사 등화 스님은 “10월 한 달동안 부석사를 다녀간 관광객은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며 “한국의 아름다운 절집 부석사는 부동의 1순위”라고 했다.

서울에서 직장 퇴직 후 3년 전 귀향한 이재식(69)씨는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부석’이라고 답했더니 부러워하더라”며 “내 고향 부석사 그리고 우리마을은 참 아름다운 절집이 있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부석사 매표소 앞에서 특산물을 팔고 있는 이정희(67)씨는 “여기 가판에 나온 집은 30집쯤 되는데 농사지은 것(사과, 고추, 산나물, 약초, 달래, 콩 등)은 무엇이든 다 판다”며 “많이 팔 때는 하루 15만원 정도 팔고, 안 팔리는 날은 5만원도 못 판다”고 했다.

방골 하태홍(70)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 자리에서 ‘사과축제’가 열린다”며 “돌이 많은 봉황산((鳳凰山, 818m) 기슭에서 생산된 ‘부석사표 사과’는 돌같이 야물고 꿀같이 달다”고 말했다. [부석사과 010-3543-0761]

김진우(66) 노인회 총무는 “부석사 입구에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파일날(부처님오신날)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 길가에 포장을 치고 국밥 장사를 시작한 것이 최초”라며 “지금은 600석 규모의 부석사 식당을 비롯하여 종점, 무량수, 자미가, 평화 등 대형 식당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부석사 식당 054-633-3317]

북지2리 장세호 이장은 “우리 마을은 사과·자두 농사와 식당·상가 운영, 특산물 판매 등으로 가구당 평균 8천만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생동감 넘치는 마을”이라며 “현재 70호에 150명 정도가 산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부석면 북지2리 방골·허뭇거리 사람들>
 

▲ 장세호 이장
▲ 이창은 노인회장

▲ 신만례 할머니
▲ 장세홍 씨

▲ 이재식 씨
▲ 하태홍 씨

▲ 하건홍 씨
▲ 이정희 씨

▲ 김진우 노인회총무
▲ 박찬한 새마을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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