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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23]순흥면 내죽1리(속수마을)

비봉산을 등지고 죽계를 바라보는 마을 ‘속수(涑水)’

2016. 11. 07 by 영주시민신문

▲ 속수마을 전경
중국 산서성 ‘속수’에서 전래된 마을이름
삼국-조선의 수많은 역사 간직한 비봉산

순흥면 속수 가는 길
속수마을은 소수서원으로 가는 은행나무길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마을이다. 영주시내 서천교사거리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으로 간다.

순흥면사무소에서 소수서원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죽계사거리에서 초암사·성혈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여기서 머리를 들어 앞을 보면 눈앞에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고, 산자락에 동향하여 자리 잡은 마을이 효친애향의 마을 속수다.

지난 23일 속수에 갔다. 박두환 이장의 주선으로 윤희수 노인회장, 정재호 어르신, 박정수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속수마을의 역사와 비봉산의 전설을 듣고 왔다.

▲ 정향속수
속수마을의 역사
고을의 이름이 급벌산-급산-흥주-순정-흥녕-순흥으로 변천해 오는 동안 ‘속수마을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왔을까?’가 궁금하다.

이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이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 내죽리(內竹里)에 속한 마을(坊)이었다. 1849년에 편집된 순흥지(順興誌)에 ‘속수(涑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당시 내죽면에는 성북(城北), 속수(涑水), 금성(金城), 중촌(中村), 원촌(院村), 옥계(玉溪), 광문(光文), 송림동(松林洞), 배점리(裵店里), 덕현(德峴) 등 10개 마을이 있었고 속수가 면소재지였다.

조선 말(1896년)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순흥군 내죽면 속수리(涑水里)가 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속수, 원촌, 죽촌)에 편입됐다. 그 후 1980년 영풍군 순흥면 내죽리, 1995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두환(54) 이장은 “내죽1리는 속수 단일 마을로 60호에 150명이 살고 있다”며 “대부분 사과와 복숭아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비봉사
속수(涑水)의 지명 유래
사람들은 이 마을을 ‘속시이’라고 부르지만 문헌에 ‘속수’로 나오므로 ‘속수’로 쓰기로 한다.
이 지역을 ‘내죽리(內竹里)’라 한 것은 ‘죽계(竹溪)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니 이해가 쉽다. 그럼 ‘속수’ 또는 ‘속시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마을 윤희수 노인회장은 “영주시사 지명유래편에 보면 ‘배점리 뒤실에서 흘러나온 내(川)가 죽촌(竹村)를 거쳐 죽계로 합류하는 모습이 마치 중국의 산서성(山西省)에서 발원하여 섬서성(陝西省)으로 흐르는 지류 속수(涑水)와 흡사하다 하여 속수라 했다’고 전해온다”며 “누가 언제 ‘속수’라고 명명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중국 지명이 순흥에 오게 된 연유를 묻자” 순흥의 한 원로는 “‘고려 말 안향 선생께서 왕을 호종하고 여러 차례 원나라에 다녀오셨다’고 하니 안향 선생의 일행이나 또 다른 순흥인에 의해 ‘속수’라는 지명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마을 정진화(73)씨는 “우리 마을은 중국의 속수(涑水)와 구별하기 위해 삼수변의 속(涑)자가 아닌 두이 변의 속(속)자를 쓴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회관 앞 마을표석에 정향속수(情鄕속水)라고 새겨져 있다.

▲ 거북바위
순흥의 역사와 비봉산
속수마을 뒷산이 비봉산(飛鳳山, 430m)이다. 순흥의 진산으로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산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순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보물창고이자 역사박물관이다.

정상에는 남북 335m, 동서 460m 규모의 산성이 있고, 성내에는 수량이 풍부한 우물도 있다. 비봉산 남동쪽에는 순흥 서낭당 본당이 있다. 이 서낭당에는 순흥안관신위(順興安官神位)를 주신(主神)으로 그 좌우에 동서배위신위(東西配位神位)를 모셨고, 좌협칸에 삼신당신위(三神堂神位)를 모셨다.

비봉산 정상 남서쪽에는 6세기 초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읍내리 고분벽화’가 있고, 고구려인이 살았던 흔적으로 짐작되는 ‘어숙묘’도 있다. 또 비봉산 정상은 예전에 부녀자들의 화전놀이 장소로 붐볐으며, 정상 약간 아래쪽에는 비를 내리게 한다는 돌거북이 있다. 이 마을 정재호(81) 어르신은 “비봉산은 순흥 역사의 보고”라며 “어디든지 땅을 파면 옛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말했다.

▲ 마을 회관
비봉산 돌거북 기우제
비봉산 왼쪽 어깨 부분에 비를 내리게 한다는 ‘영험한 돌거북’이 있다. 기자는 이 마을 박종섭(76, 순흥향교총무)씨의 안내로 돌거북을 만나로 갔다. 수풀이 무성하여 낫으로 길을 열어 가며 겨우 돌거북을 찾았다.

8부능선 속수&뒤실 합류 등산로에서 뒤실방향 30m 지점에 있다. 투구모양의 화강석에 제법 정교한 솜씨로 다듬어진 돌거북은 등껍질 무늬가 선명하다. 등 가운데에는 팔각받침대가 있고, 그 둘레에 연꽃이 새겨져 있다. 거북의 머리는 떨어져 나간듯하나 네 발은 금방이라도 기어갈듯한 기세다.

무슨 대좌였던 것 같기도 한 돌거북은 길이 117cm, 너비 90cm 정도이다. 박종섭씨는 기우제에 대해 “가뭄이 심하면 집집마다 금줄을 치고 거기에 버들가지를 꽂은 다음 물병을 양쪽에 걸어놓고 비가오기를 기원한다. 그래도 비가 안 오면 아낙네들이 소똥꾸러미와 지렛대를 들고 비봉산 돌거북에게로 간다.

지렛대로 거북 궁둥이를 자기 동네쪽으로 돌려놓으면 거북이가 먹은 복운을 자기마을에다 배설한다는 뜻이다. 또 거북 등에 소똥을 수북이 쌓아 놓으면 하늘(天神)이 소똥을 씻어내기 위해 많은 비를 내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이를 기우제 또는 기우법석(祈雨法席)이라고도 하는데, 실제 기우법석을 떨고 내려오다 보면 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부친께 들었다”며 “영험한 돌거북 기우제는 이마을 저 마을 아낙들이 한바탕씩 법석을 떨고 가니 거북의 시달림인들 오죽하겠는가?”라고 말했다.

▲ 1940년대 비봉산 모습
비봉산 화전놀음
2016년 가을. 덴동어미 화전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비봉산을 찾아오는가 하면 화전가 덴동어미가 마당극으로 공연되고, 문화단체가 학술대회를 열고, 동양대에서는 세미나를 열었다.

‘화전놀음’이란 조선시대 때 여성들이 봄날에 모여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으며 꽃놀이 하는 것이고, ‘화전가’는 꽃놀이 하는 풍속을 한글 가사로 기록한 것이다.

지금 ‘덴동어미 화전가’가 주목 받고 있는 것은 이 화전가의 배경이 ‘비봉산’이고, 주인공인 덴동어미가 순흥 어느 마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덴동어미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화전가로 쓴 사람이 순흥 여성이란 것이다. 또 이 화전가가 한국 최고의 화전가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순흥 여성들의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마을 우상여(77)씨는 “최근 떠들썩한 덴동어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새댁시절 비봉산에 올라 화전놀이를 한 적이 있다”며 “그때는 유행가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 효친애향
▲ 근농부국


속수마을 사람들
초암사로 가는 도로에서 마을길로 150m 쯤 올라가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그 뒤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부분 현대식 건물로 개량되었지만 아직 새마을시대 기와집도 보인다. 골목길을 S자로 돌아 마을 뒤로 올라가면 귀농인들의 양옥집들이 띄엄띄엄 보이고 과수원길을 지나면 비봉사(1981 창건)라는 절이 있다.

이 마을 정태화(77)씨는 “비봉산에 올라 죽계를 내려다보면 중촌들, 소수서원, 사현정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며 “전망 좋은 마을이라서 최근 귀촌 주택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석(73)씨는 “속수는 근농부국(勤農富國) 깃발아래 벼농사 중심에서 인삼-사과-복숭아로 변천해 왔다”면서 “현재는 복숭아가 특산물”이라고 말했다.

박정수(82) 어르신은 “순흥면은 지금도 25개 자연부락이 한마을도 빠짐없이 서낭제를 지낸다”며 “속수마을은 비봉산 중턱에 있는 바위를 동신으로 모시고 정월보름날 자시에 서낭제를 지낸다”고 했다.

임영부(79)씨는 “서낭신에게 소지를 올릴 때 대통령에서부터 도지사-시장-면장-이장 그리고 집집마다 소원을 비는 소지를 올린다”면서 “1월 1일 비봉산 해맞이 때도 대한민국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고 말했다.

회관 작은방에서 할머니들을 만났다. 한위순(76)씨가 황연옥(82) 할머니를 ‘홍사덕 전 국회의원 4촌형수’라고 소개 했다. “홍 전 의원이 이 마을에 살았느냐?”고 여쭈니 “국민학교 3학년때까지 살다가 영주로 전학 갔다”고 말했다.

속수 사람들은 마을을 빛낸 훌륭한 인물로 ‘조선 말 1852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을 지낸 이계로(진성), 재일동포 남정광(일본 재계 22위), 국회부의장을 지낸 홍사덕 의원, 남효인 교장 등을 꼽았다.

이원식 시민기자

<순흥면 내죽1리 속수마을 사람들>

▲ 박두환 이장
▲ 윤희수 노인회장

▲ 정재호 어르신
▲ 박정수 어르신

▲ 임영부 씨
▲ 박종섭 향교총무

▲ 정태화 씨
▲ 박종석 씨

▲ 황연옥 할머니
▲ 한위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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