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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22]봉현면 유전1리(진밭)

전주이씨 효령대군 후손 500년 세거지 ‘진밭(泥田)’

2016. 11. 03 by 영주시민신문
진밭마을 전경

안동권씨 야옹공 후손 200년 집성촌
산신제·동신제, 역사깊고 보존가치 높아

진밭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죽령방향으로 간다. 풍기에서 내려 오현교차로-풍기IC- 대촌삼거리-히티재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유전리 ‘꽃피는 산골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천부산을 향해 3-400m 가량 올라가면 진밭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400년 수령의 동수나무가 있고 집들은 천부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자리 잡았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을 기준으로 남쪽은 남촌, 북쪽은 북촌이라 한다.

지난 16일 진밭에 갔다. 이날 남촌과 북촌을 오가며 이호영 이장, 이영철 노인회장, 권영무 노인회총무, 권상태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표석

역사 속의 진밭(泥田)
아주 옛날 진밭에는 누가 살았을까? 구전에 의하면 「고려 말 순흥안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고령박씨, 풍기진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 권영무(73)씨는 마을 주변에 순흥안씨, 고령박씨, 풍기진씨 고총(옛무덤)이 산재해 있다“고 말했다.

진밭 지역은 조선 초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풍기군 노좌리(魯佐里) 이전동방(泥田洞坊)이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풍기군 노좌리면 이전리(泥田里)가 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노좌리면과 와룡동면을 통합하여 ‘봉현면’이라 했다. 또 유음리(柳陰里)와 이전리를 통합하여 유전리(柳田里)라 칭했다. 1980년 영풍군 봉현면 유전리, 1995년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신단

지명 유래
유전1리는 진밭, 주막거리, 히티재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아주 옛날 이 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무렵 땅에 겉물이 흘러나와 논바닥처럼 질퍽질퍽하다 하여 ‘진밭’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조선 초 군현의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이 마을 선비들이 진흙 이(泥)자에 밭 전(田)를 써 ‘이전동(泥田洞)’이라 불렀다. 진밭 초입에 있는 마을을 ‘주막거리’라고 한다.

조선 후기 무렵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일제 때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풍기-예천 간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농산물을 실은 구루마(달구지)가 다니면서 주막이 생겼다고 한다.

히티재(해발 382)는 옛 문헌에 여현(礪峴)이라고 나온다. 고개 주변에 칼을 벼루는 흰 빛깔의 돌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돌이 ‘희끗희끗하다’하여 ‘히끄티끄타다’로 발음하다보니 ‘히티’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이호영(57) 이장은 “유전1리는 100% 사과농사만 짓고 있으며, 100여 가구에 200여명이 살고 있는 사과마을”이라고 했다.

동신단(조산)

전주이씨·안동권씨 집성촌
진밭(泥田洞) 전주이씨는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현손 귀영(貴永, 1497-1573)의 후손들이다. 충의위(忠義衛, 정5품) 벼슬을 지낸 귀영이 기묘사화(1519, 중종14) 무렵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남하여 이곳에 정착하니 그 때가 1519년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전주이씨가 진밭에 세거한지는 497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후손 이철재(70, 효령대군 3세 종친회장)씨는 “귀영 할아버지의 낙남내력은 기묘사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귀영 선조는 두 형과 함께 낙남하였는데 맏형 귀장(貴長, 홍원현감)은 충주 월악산에, 중형 권유(貴胤, 軍器寺副正)는 봉화 거촌에, 귀영 선조는 당시 풍기군 노좌리면 진밭에 터를 잡으시고, 풍기진씨에 장가들어 입향조가 되셨다”고 했다.

이씨는 또 “귀영 할아버지는 이곳에 정착한 후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시어, 6세손 윤림(潤霖, 1635-1729) 선조는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에 올랐으며, 12세손 인동(仁東, 1787-1854) 선조는 문과 병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내셨다. 또 13세손 기학(起鶴, 1880-1944) 선조는 판임관으로 교관(敎官, 학생을 가르치는 벼슬)을 지냈으며, 기학의 손자 완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LG본사 임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말했다.

동수나무

진밭의 안동권씨는 봉화 닭실 충재 권벌의 형 야옹공(野翁公, 1475생) 권의의 후손들이다. 통정대부행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行龍양衛副護軍)을 지낸 권재박(權載博, 30세손)의 일가와 권경도(權敬度, 29세손)의 일가가 조선 순조(1800-1834) 무렵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200여 년동안 세거해 왔다. 후손 권정섭(81) 어르신은 “진밭 안동권씨는 야옹공의 후손으로 200여년 전 예천에서 이곳으로 이거했다”며 “1950-60년대에는 30여호에 수백명이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나가고 지금은 10여호 정도 산다”고 말했다.

앵소정(巢亭)

산신제와 동신제
진밭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산신제·동신제 풍습이 전해온다. 매년 정월 초7일이 되면 제관 5명과 집사 2명을 뽑고 도가를 정한다. 마을에 금줄을 치고 제관은 7일동안 몸과 마을을 경건히 한다. 산신제는 정월보름날 자시(子時)에 천부산 중턱 산신단에서 지내고, 동신제는 마을 어귀 조산에서 지낸다.

제물은 백설기, 3실과, 포, 닭고기, 메와 국을 쓰고 술은 도가에서 정성껏 담은 청주를 쓴다. 제의(祭儀)는 집례자의 창홀에 따라 강신-헌작-독축-부복-소지 순으로 행한다. 산신제 독축 소리가 들리면 조산에서도 동신제를 올린다. 제례가 끝나면 도가에 모여 음복을 하고, 이튿날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나누면서 풍물놀이를 한다.

지난 19일 오전 해발 480m 천부산 중턱에 있는 산신단으로 향했다. 권영무씨가 길을 안내하고 심재복씨가 낫으로 길을 열어 산신단에 오르니 아름드리 소나무숲속에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고, 그 앞에 석간수(石間水)가 솟아오르는 샘이 있다.

심재복(73)씨는 “산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려 때부터라고 전해진다”며 “이 물로 술을 빚고 밥을 지어 산신께 올린다”고 했다. 산신제를 주관하는 권영무씨는 “진밭의 산신제와 동신제는 역사 깊고 매우 특이하여 보존 가치가 있다”며 “제의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을화합, 풍년기원, 만사형통, 장원급제, 학문장려 등 선조들의 소망과 지혜가 담겨 있는 민속신앙”이라고 말했다.

노인회관

조산의 전설과 앵소정 
도로에서 주막거리를 지나면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에 있는 탕건바위는 진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석인 듯하다. 탕건바위 옆에는 최근에 세운 앵소정(앵巢亭)이란 정자가 있다. “앵소정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심재복씨는 “앵소란 꾀꼬리 앵(앵)자에 집 소(巢)자를 쓴다. 즉 꾀꼬리가 유전리 ‘버드나무 숲에서 논다’는 뜻”이라며 “권영무씨가 이름을 짓고 “백현(노좌리) 선생이 현판을 썼다”고 말했다.

앵소정 개울 건너편에 조산(造山)이라고 하는 돌탑 2기가 있다. 이 돌탑은 예전에 마을에 과거급제자가 나오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돌탑을 쌓았다고 한다. 원래 3기가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1기는 허물어지고 현재 2기만 남아 있다. 이 마을 권영무씨는 “돌탑 3기는 이 마을에 과거급제자 3인이 나왔다는 징표”라며 “이는 이 마을이 학문을 중시 한 ‘선비의 마을’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탕건바위

진밭마을 사람들
기자가 진밭에 갔던날 동수목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머니처럼 자상하신 이병순(84)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마을의 내력을 아시는대로 알려 주셨고, “누구누구를 만나보라”고도 하셨다. 나중에는 “잘 마치고 갔느냐?”는 전화도 주셨다. 이날 오후 진밭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남촌 은행나무 정자에서 황후남(90) 할머니, 서노미(76)씨, 김옥임(67)씨, 이영철(76) 노인회장을 만났다.

김옥임씨가 차를 한잔 내 주시면서 남촌 사람들을 소개했다. 황 할머니는 기자수첩에 ‘황후남’이라고 또박또박 적어주셨다. 서노미씨는 “50년전 움막 같은 초가집에서 옥수수, 감자 먹고 살았다”며 “지금은 인삼·사과농사로 먹고 살만하다”고 말했다. 이영철 노인회장은 “마을에 젊은 사람이 많은 게 자랑”이라며 “인삼과 사과 농사로 억대 순수익을 올리는 농가가 여럿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북촌 노인회관에서 정재순(85) 할머니를 만났다. 정 할머니는 “예전에 진밭에 100여호가 넘게 살았는데 절반이 전주이씨였다”며 “진밭은 안동권씨와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조상을 잘 섬기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회장·사장·박사가 많은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주막거리

마을 사람들은 진밭을 빛낸 현세 인물로 ‘김원한(석공이사), 권태환(치안본부), 권영하(법무협회장), 이덕영·이윤영(병원장), 이철재(청권사 대표), 이홍재(사무관), 이수도(서울대 박사), 이재형(의학박사), 권영갑(방사선전문의), 김영수(세무서장), 이창재(경감), 이준재(경영박사), 이수도(물리박사), 최준호(포철부장) 등을 꼽았다.

이원식 시민기자

<봉현면 유전리 진밭마을 사람들>
 

이호영 이장
권영무 노인회장

 

 

 


 

권상태 새마을지도자
황후남 할머니
정재순 할머니
이병순 할머니
권정섭 어르신
서노미 씨
심재복 씨
김옥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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