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도솔봉 동자삼 전설의 배경마을 ‘옥동’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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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120]풍기읍 전구2리 옥동

도솔봉 동자삼 전설의 배경마을 ‘옥동’

2016. 10. 17 by 영주시민신문
옥동마을 전경

연안명씨 부사공파 150년 세거지
옥동표 사과·송이로 유명한 마을

풍기읍 옥동 가는 길
옥동은 풍기온천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도솔봉(兜率峰) 아래 첫 동네다. 영주시내에서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죽령 방향으로 가다가 풍기읍 백리교차로에서 내려 창락으로 간다. 창락1동 마을 입구에서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중앙고속도로 굴다리 지하도를 통과한다.

과수원 사이로 400m 쯤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살기좋은 마을 옥동’이라고 새긴 큼직한 표석이 나타난다. 여기서 오르막길 100여m 올라가면 느티나무 쉼터와 노인회관이 있고 그 뒤로 띄엄띄엄 집들이 있다. 지난 1일 오전 옥동에 갔다. 노인회관에서 명재기 노인회장의 주선으로 마을 어르신 여러분을 만나 옥동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옥동마을 표석

마을의 역사 
옥동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창락리(昌樂里) 전고방(前皐坊)이라 부르다가 영조(英祖, 1724〜1776) 이후에 와서 창락면 전고리(前皐里)가 됐다. 영주삼읍지(榮州三邑誌)에 보면 당시 창락면에는 관촌리(館村里), 전고리(前皐里), 수철교리(水鐵橋里)가 있었다.

그 후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순흥군 창락면 전고리가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전구2리가 되었고, 1995년 영주시 풍기읍 전구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인회관

지명 유래
조선 때 전구1리 전구동(前邱洞)은 풍기군 와룡동면(臥龍洞面)에 속했고, 전구2리 전고동(前皐洞)은 순흥부 창락면(昌樂面)에 속했다. 전구(前邱, 언덕구)나 전고(前皐, 언덕고)는 ‘앞 언덕’ 또는 ‘앞 두들’이란 뜻으로 쓰이는 같은 이름이다. 이 지역이 풍기군이 아니고 순흥부에 속한 것은 이 지역이 교통과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순흥부가 관할했다. 전구2동을 ‘옥동’이라고 부른다.

뒷산 봉우리에 옥녀라는 선녀가 내려와 바위 위에서 베를 짯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베틀바위라 하고, 그 산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이라 부른다. 그리고 옥녀봉 아래에 마을이 있다하여 ‘옥동’이라고 부르게 됐다. 언제부터 옥동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송지향 선생의 도솔봉 탐사기(1940)에 옥동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조선 중기무렵부터 옥동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 김덕근(78)씨는 “지금은 전구2동이라 부르지만 6-70대 어른들은 ‘옥동’이 더 정겹고 익숙하다”며 “마을 뒷산을 자세히 보면 여성(女性)을 닮아 ‘옥녀봉’이라 부르고 있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그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전구동 노인회

도솔봉 동자삼 전설
도솔봉은 사람의 발길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성스러운 산이다. 그래서 예부터 산삼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전해져 왔다. 도솔봉 산삼밭에 사는 산삼 중 100년 묵은 큰 산삼이 사람으로 변하기를 원했다. 100일동안 소백산신령께 기도하여 동자삼으로 변신했다.동자삼은 풍기장날이면 산에서 내려와 옥동마을 앞을 지나 풍기장에 갔다가 돌아온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동자삼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마을 앞 느티나무 쉼터에서 동자삼을 만나 산삼을 캘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자삼은 “도솔봉 산삼밭에 오면 가장 큰 산삼이 동자삼 나다. 그러니 동자삼은 뽑지 말고 다른 산삼은 마음대로 캐가라”고 했다.

이튿날 산삼밭에 도착한 농부는 동자삼의 부탁을 저버리고 가장 큰 동자삼을 힘껏 당겼다. 하지만 산삼은 뽑히지 않고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그 많던 산삼들은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혼비백산 마을로 내려온 욕심 많은 농부는 끝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욕심을 버리고 착하게 살라’는 교훈이 담긴 선조들의 이야기다.

십리반석

연안명씨 집성촌
전구2리 옥동은 연안명씨(延安明氏) 집성촌으로 지금도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연안명씨의 시조는 1362년 중국 서촉에 하(夏)나라를 세운 명옥진(明玉珍)이다. 아들 명승(明昇)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세력에 나라를 빼앗기고 1372년 고려에 귀화했다. 황해도 연안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전구동의 연안명씨는 부사공파(副使公派) 21세손 명제만(明濟萬, 1838년생)이 조선 말 철종 무렵 평안북도 영변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입향조가 됐다. 후손 명재기(78)씨는 “저의 증조부(濟萬)님이 장성하여 이곳으로 이거하셨다면 아마도 1860년경으로 추정된다”며 “당시 다래덤불을 걷어내고 토담집을 짓고, 험한 돌산을 개간하여 논밭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고모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제만의 후손들은 1960년대에는 20여 가구로 늘어났으나 산업화 이후 대부분 도시로 떠났다고 한다. 이 마을 명재기 노인회장과 명재철 이장은 제만의 증손이다.

옥동표 사과

송지향 선생이 본 십리반석
송지향 선생은 1940년 6월 19일 단원 9명과 함께 도솔봉을 탐사하고 탐승기를 남겼다. 「전구의 울창한 느티나무숲을 지나 ‘옥동(玉洞)’에 이르니 소몰고 일터로 가는 농부의 휘파람소리가 드높다. 송림이 무성한 산 속 절경을 무엇에 비유할까 생각하다 도솔계곡 그대로 보리라 하였다.

십리반석은 계곡 전체가 한 덩이 반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창울한 숲 속으로 맑은 물이 바위를 타고 내다르며, 혹은 푸른 못으로 변하고 혹은 폭포가 되었다가 이름 모를 새소리와 함께 흐르니 사바의 번뇌를 씻어주는 듯하다」라고 적었다.

도솔봉 송이

심마니와 송마니 
도솔봉에는 ‘산삼밭 서마지기, 옻밭 서마지기, 부추밭 서마지기가 있다’하여 심마니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비의 산이다. 김석홍 노인회 총무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산삼캐고 더덕캐는 심마니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 중에는 산삼꿈을 꾸고 산에 가서 산삼을 캤다는 이야기가 가끔 전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산삼캐는 사람을 ‘심마니’라 하고 송이 채취하는 사람을 ‘송마니’라 한다”고 어느 원로가 농 삼아 말했다. 올해는 송이풍년이라고 한다. 옥동 송마니를 만나기 위해 도솔계곡으로 올라갔다. 십리반석으로 가는 계곡에 접어드니 골이 깊고 산은 높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으스스하다.

도솔봉 전경

더군다나 송이를 지키는 진돗개 다섯마리가 으르릉거리며 짖어대니 오금이 저리다. 마침 국립공원사무소 직원의 안내로 송이집하장까지 올라갔다. 송이 채취 현장에서 만난 명재철 이장은 “도솔봉 송이는 백두대간 송이 중 향이 좋기로 으뜸”이라며 “새벽 5시에 출발하여 송이밭에 올라가서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채취하고 3시경 집하장에 도착한다. 올해는 하루 약 30키로(300만원)씩 채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녀봉과 옥동

옥동마을 사람들
옥동쉼터 정자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온통 사과나무뿐이다. 노인회 김석봉 총무의 안내로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송이 향이 진하다. 송이버섯에 애호박 넣고 끓인 찌개로 맛난 점심을 먹었다. 이 마을 이송자(75)씨는 “예전에 연안명씨 웃대 어른이 이 마을에 처음 와서 다래덤불을 걷어내고 토담집을 지었으며, 돌을 캐내고 밭을 일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제일 연세가 높으신 김정순(88) 할머니는 “도솔봉은 돌산이고 험준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많다”며 “오염되지 않은 옥계청류가 마을 앞으로 흘러 옥동은 산좋고 물좋고 공기좋은 살기좋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권순옥(83) 할머니는 “예전에는 논이 적고 쌀이 귀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때 통일벼가 나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순희 할머니는 “지금 옥동은 100% 사과농사만 짓고 산다”며 “도솔봉 중턱에서 맑은 공기와 햇볕을 먹고 익은 옥동사과는 빛깔 좋고 맛도 좋다”고 했다.

“옥동에 전통음식이 있으냐?”는 물음에 김광순(80) 할머니는 “보릿고개 때는 수제비, 칼국수, 보리개떡을 많이 먹었지. 아주 옛날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염소탕을 먹는 게 전통이 됐다”고 말했다.

도솔봉 가는길

실제 도솔봉을 여러 번 올랐다는 이금해(여, 76)씨는 “옥동계곡 십리반석을 지나 흰밴장-안너리-말망아지등으로 오르는 길은 바위틈 사이를 기어올라야하기 때문에 심마니가 아니면 오르기 힘든다”며 “그 바위틈에서 산삼, 토종꿀, 석이버섯, 더덕, 당귀 등 귀한 보물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북청에 살다가 1947년 부모님 따라 38선을 넘어 월남했다는 김덕근(당시 8살) 전 노인회장은 “6·25 전 월남하여 단양 등 여러 곳에서 살다가 1988년 옥동에 정착했다”며 “옥동은 참으로 살기좋은 대한민국 힐링마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풍기읍 전구2리 옥동 사람들>

명재철 이장
명재기 노인회장
김덕근 전 노인회장
김석홍 노인회총무
김정순 할머니
권순옥 할머니
김순희 할머니
김광순 할머니
이금해 씨
이송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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