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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19] 단산면 동원리 ‘오상’

파평윤씨 200년 세거지 ‘오상(五相)’

2016. 10. 10 by 영주시민신문

▲ 오상마을 전경
영의정 삼산의 아들 윤당 후손 세거지
옛 지명은 ‘흑석’, 조선말부터 ‘오상’

단산면 오상 가는길
오상마을은 단산면 제일 남쪽의 동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영주시 상망동 진우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영주시내에서 봉화통로로 가다가 상망교차로에서 진우·부석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보름골을 지나서 마근데미재를 넘으면 진우마을이다.

진우삼거리에서 대마산목장을 향해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오상입구’라는 표석을 만나게 된다. 좌측 포장도로로 접어들어 갈가리고개를 넘어 500여m 쯤 내려가면 파평윤씨 세거지 오상마을이다. 지난 25일 오후 오상마을에 갔다.

야트막한 야산자락에 남향하여 자리 잡은 마을에는 25가구(50명)가 집성촌을 이루어 산다.

▲ 마을표석
행정구역의 변천과 ‘오상’
오상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 동원리(東園里) 흑석방(黑石坊)이라 했다.

순흥지에 보면 당시 동원리에는 파회(波回), 오현(梧峴), 구고(九皐), 이목곡(梨木谷), 사천(沙川), 등영(登瀛), 구미(龜尾), 자분리(自分里), 흑석(黑石, 일명五相) 등 10개 속방(屬坊)이 있었다.

그 후 1896년(고종33, 을미개혁)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순흥군 동원면 오상리가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단산면 동원리에 편입되었고, 1995년 영주시 단산면 동원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파평윤씨 세거지 표석
지명유래
순흥부의 역사를 기록한 재향지(梓鄕誌)에 보면 조선 때 마을 이름이 흑석(黑石, 一名五相)이라고 나온다. 그럼 ‘흑석’이란 지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마을 윤주익(70)씨는 “어릴 적 할아버지께 들었다”며 “예전에 마을 앞으로 오구천(烏龜川)이 흘렀다. 주변에 기름진 논밭이 있었는데 흙 색깔이 유난히 검어서 기이하게 생각했다. 조부께서 고조부께 여쭈었더니 ‘땅속에 검은 거북바위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예전에 이곳 지명을 ‘흑석’이라고 한 것은 전설로 전해오는 ‘땅 속의 검은 거북바위’에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시사 지명유래편에 보면 오상은 「고려말 다섯 정승이 혼란해진 세상을 피해 이곳에 와서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피난 생활을 한 곳이라 하여 오상(五相)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 화산정
윤석희(83) 노인회장은 “예전에 다섯 정승이 피난한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다섯 정승이 누구인지, 언제 쯤 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오상은 조선 때는 ‘흑석, 일명오상’이라 적었고, 조선 말 고종 때부터는 ‘오상’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 윤주극 추모비
파평윤씨 200년 세거지
마을 초입에 파평윤씨 세거지 표석이 있다. 표석 뒤에는 「이곳은 파평윤씨 시조 태사공 윤신달(尹莘達, 893-973)의 16세손 영천부원군 삼산(三山)의 후손 세거지다」라고 적혀 있다.

파평윤씨는 역사적으로 왕후(王后), 장상(將相), 거유(巨儒), 부마(駙馬), 충신(忠臣)을 많이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오상의 파평윤씨는 사헌부장령·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영천부원군 삼산의 아들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윤당(尹塘, 1422-?)의 후손이다.

윤당은 세조 때 단종복위(1453)를 도모하다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그 선조가 공신에 있었던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봉화 닭실(酉谷)에 은거하게 됐다. 윤당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이 충재 권벌의 어머니다. 윤당은 외손자 권벌이 대학자이면서 정치가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200년 수령 버드나무
윤당의 후손 일부는 닭실에 남고 일부는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25세 의향(義香)이 1600년대 초 봉화 닭실에서 안동 도산으로 이거하였고, 1800년경 30세 상덕(相德, 1780-1831)이 도산에서 오상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상덕이 장성하여 오상에 정착했다면 1800-1810년으로 추정되므로 파평윤씨 오상 세거 역사는 약 200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을 후손 윤석희(83)씨는 “입향 당시 상덕 선조님의 형님 되시는 상겸(相謙)·상의(相儀)·상임(相任) 등 4형제분이 함께 입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 옛 우물터 자리
윤주극 면장과 윤주갑 교장
마을 앞 길가에 윤주극(尹柱極, 1894-1948)의 기념비와 추모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선구자 윤주극은 1913년 현 순흥초등학교 전신인 순흥소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1933년 순흥보통학교 분교장인 오상개량서당을 건립하여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역 청소년들을 계몽하고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이 마을 윤주기(65)씨는 “윤주극 선생은 윗오상에서 태어나셨으며, 일제강점기 때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라며 “해방 후에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사방사업에 전념하셨으며, 안정면장과 장수면장을 역임했다”고 말했다.

오상 사람들은 근세 파평윤씨 오상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윤주갑(尹柱甲, 1924-2015)을 추존(推尊)하고 있다. 오상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입학 전 2년간 오상서당에서 한글과 산수를 배웠고, 안동농림학교 시절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분노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무렵 태평양전쟁(1941-1945) 때 강제 징집되어 중국 남경-장사까지 끌러가 죽을 고생을 하다가 해방 후 1946년 7월에야 고국에 돌아왔다.

당시 아들(윤주갑)을 전장에 보낸 아버지(윤태원)는 ‘날마다 영주역에 가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초등 교단에 입문하여 태극기, 무궁화 교육 등 민족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영주·봉화에서 40여년간 교직에 봉직하다 1990년 2월 봉화 봉성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오상마을 윤주영(75)씨는 “윤주갑 집안 형님은 학식과 덕망이 높으신 참 선비요 교육자이셨다”며 “선조숭봉(先祖崇奉)과 종친돈목(宗親敦睦)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하셨다”고 말했다.

오상을 빛낸 인물들
오상문중 후손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충효정신’과 ‘학문을 즐기고 배운 것을 실천하라’는 선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각계각층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을 빛낸 현세 인물로는 윤주극 면장과 윤주갑 교장에 이어 윤주태(1925년생) 교장이 있고, 윤성룡(58) 단산중 교장은 재임 중이다. 영주임협조합장을 지낸 윤문희(77)씨 또한 이 마을 출신이다.

윤석희 어르신의 아들 윤재국(63)씨는 울산동부, 양주, 구로, 화성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윤 서장의 동생 윤미숙(53)씨는 대구대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윤주영씨의 아들 윤의혁(43)씨는 ㈜한국창조이벤트 부사장이고, 윤진혁(33)씨는 포스코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다. 또 이 마을 정종국(66, 봉화정씨)씨의 동생 정광석(35, 박사)씨는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윤석희 노인회장
▲ 권맹희 부회장
오상마을 사람들
오상에 갔던 날 갈가리재 아래 주목울타리가 있는 아담한 농가에서 발길을 멈췄다. 잘 우려낸 오가피차 한 잔에 오상마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윤주익(69)·권계순(68) 부부의 안내로 마을길을 걸었다.

권계순씨는 “1980년대 오한구 국회의원 시절 국민의식 설문조사에서 오상이 영주지역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곳으로 조사됐다”며 “당시 영주시내 중·고등학교에서 오상 학생들의 성적이 가장 높았다”고 말했다.

▲ 윤주영 총무
▲ 윤주익 씨

권씨는 또 옛 오상개량서당 자리와 일제 때 산림녹화사업 현장 위치도 가리켜 줬다. 동행한 최오순(63)씨는 “농업환경도 시대에 따라 자주 변하고 있다”면서 “벼농사를 대농(大農)으로 할 때도 있었고, 축산이 번성할 때도 있었다. 오상은 축산과 벼농사가 많은 편이며 마, 황기, 도라지 등 약초재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황금들녘을 걸어가면서 수백년 수령의 버드나무와 우물가 옛터도 둘러봤다.

윤주익씨는 “옛 우물터가 마을의 역사인데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며 “복원을 논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 함일영 씨
▲ 권계순 씨

마을회관에는 윤석희 노인회장, 윤주영 총무, 권맹희(83) 부회장, 정종국(66)씨, 함일영(69)씨, 배춘옥(67) 어르신이 자리를 함께 했다. 권맹희 할머니는 “마을 입구 길가에 우물이 있었는데 마을 전체가 이 물을 먹고 살았다”고 했고, 함일영씨는 “당시 우물가 샘터는 나물도 씻고 이야기도 나누는 쉼터였다”고 말했다.

마을회관은 2001년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 등 100여명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회관 벽에는 「추진위원장 윤주, 부위원장 윤주형, 총무 윤재하, 대지기증 윤주익」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회관에서 나와 화산정(花山亭)으로 향했다. ‘화산’이란 유곡의 옛 이름이다.

▲ 배춘옥 씨
▲ 정종국 씨
배춘옥(67)씨가 길을 안내해 주고, 윤주익씨가 낫으로 길을 열어 화산정에 올랐다. 화산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금빛들판이 풍요롭다.

화산정은 윤당(尹塘)이 봉화 유곡(酉谷)으로 낙남하여 건립한 정자를 후손들이 신거지 오상으로 이건한 후 1976년 보수했다. 정자에는 화산정기와 보수추진위원 명단이 걸려 있다.(오상 연락처 윤주익 010-6680-8634)

이원식 시민기자

▲ 윤주기 씨
▲ 최오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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