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극락정토의 살기 좋은 마을 ‘보계실’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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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18]부석면 보계1리

극락정토의 살기 좋은 마을 ‘보계실’

2016. 10. 03 by 이원식 기자

▲ 보계실 전경
보계 양천허씨, 뿔바우 경주손씨 세거
선성김씨 재사 재궁마, 광창 자두마을

보계 가는 길

▲ 보계1리 표석
영주시내에서 봉화통로로 가다가 상망교차로에서 진우·부석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진우-대마산목장-너운티재-배남쟁이재를 넘으면 도봉이다. 도봉과 상석 사이 중간쯤에서 보계1리로 가는 길을 따라 좌회전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동계구곡의 제1곡인 선암대(仙巖臺)가 있고, 인근에는 광릉동천(廣陵洞天)이란 바위글씨가 있다. 여기서부터 보계1리다. 황금물결을 이룬 보계들을 따라 1km 쯤 올라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광창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보계실과 재궁마가 있고 북쪽에 뿔바우가 있다.

지난 11일 보계1리에 갔다. 뿔바우 사는 김선우(75, 선성김씨대종회 도유사) 씨의 안내로 마을의 유래와 옛 선비들이 남긴 흔적들을 둘러보고 왔다.

▲ 뿔바우마을
행정구역 변천과 보계리
보계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 도강면(道講面)에 속했다. 순흥지에 보면 “당시 도강면에는 우수동(愚수洞), 석탄(石灘, 돌탄, 도탄), 각암(角巖, 뿔바우), 보계곡(寶溪谷) 등 속방이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봐서 ‘보계곡’과 ‘뿔바우’는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 된다.

그 후 1896(고종 3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순흥군 도강면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군 부석면 보계리, 1995년 영주시 부석면 보계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광창마을
지명유래
‘보계’는 원래 보계암(寶溪庵)에서 연유된 지명이라고 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 즉 고뇌(苦惱) 없이 지극히 평안하고 자유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보계는 천마산(天馬山)에서 발원한 물과 땅에서 솟는 물이 합류하여 근심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내려준 ‘보배로운 땅’이라 하여 ‘보계’라 했다는 설이 있고, 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치 방 안 같다 하여 보계실(寶溪室)이라 했다고도 한다.

▲ 광창 서낭당
‘한국 지명유래 고찰’에 보면 ‘실(室)자가 든 마을은 고려 때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라고 하며, 이름난 문한(文翰, 글 잘 하는 사람)이 살든 마을’이라고 했다. 뿔바우(角岩, 珏岩)는 마을 입구에 짐승의 뿔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뿔바우’라 부르다가 각암(角岩)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광창(廣倉)은 넓은 들(廣)과 곡식 창고(倉)의 뜻을 따 ‘광창’이라 했다고 한다. 재궁마는 이곳에 선성김씨 재사(齋舍)가 있어 ‘재궁마’라고 부른다.

▲ 보계당
보계실(寶溪室) 보계당(保繼堂)
보계실 앞에는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고 마을 뒷편에는 보계당이 있다. 보계당은 단종 복위를 주도한 절신(節臣) 허방(許邦)과 허윤공(許允恭), 허지(許智) 등 삼대의 절의(節義)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 허육(許堉, 1871-1944)이 1935년에 건립한 정자다.

허육은 양천허씨 영주(띄기) 입향조 허윤공의 14세손으로 보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살림을 크게 일구어 재력이 ‘천석꾼’에 이르렀다. 허육이 정자가 완공되던 날 ‘모선당(慕先堂)’이라 이름 지어 정산(貞山, 金東鎭)에게 의논을 청했다. 정산이 말하기를 “‘모선당’이라는 이름도 좋기는 하나, 보전하고 지키는 아름다움과 계승하고 서술하는 훌륭함이 더 좋지 않겠는가?”라며 “마을의 이름과 서로 비슷한 점을 취해 보계당(保繼堂)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하여 정자 이름이 ‘보계당’이 됐다.

이 마을 출신 허정호(68)씨는 “보계의 양천허씨는 1800년대 초 지도 선조(之道, 1685-1744, 윤공의 8세손)의 후손들이 띄기에서 이거하여 이곳에 터를 잡았다”며 “보계당을 세운 허육 선생은 효성이 지극한 군자였으며, 당시 정산 김동진 선생, 의금부도사를 지낸 민규식 선생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장려하고 자선(慈善)과 구휼(救恤)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보계당 옆에 사는 박옥(85) 할머니는 “허 부자는 부석 화감의 만석꾼 김규수 다음가는 부자로 사방 30리 안의 땅은 모두 허 부자 땅이었다”고 했다. 보계실 출신 남정순(63) 농협조합장은 “보계는 ‘소쿠리형’ 골짝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며, 물이 풍부하여 흉년 없는 마을이었다”며 “마을의 상징 500년 수령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으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고사(告祀)를 지낸다”고 말했다.

▲ 뿔바우
경주손씨 뿔바우 입향
뿔바우 마을 입구에 있는 탕건바위는 엄숙하고 위엄 있어 보인다. 맞은편 논 가운데에는 도깨비 뿔을 닮은 뿔바우가 있다. 뿔바우는 경주손씨가 400여년동안 세거한 집성촌이다.

조선 선조 때 손흥경(孫興慶, 1543-1611)이 영천 북쪽 꽃내(봉화 화천)에서 옮겨와 터전을 열었다. 그는 156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퇴계 문하에 들어가 도학과 성리를 탐구했다. 그의 아들 손약(孫약)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손희(孫禧)는 직장을 지냈다. 흥경의 손자 손회종(孫會宗, 1602-1667)은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회종의 증손 손이웅(孫以雄, 1740-1808)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에 올랐다.

▲ 경주손씨 별묘
이로서 뿔바우 경주손씨는 명문사족(名門士族) 반열에 오르게 됐고, 향촌 심학(心學)을 선도하게 됐다. 후손 손진걸(63)·김영옥(59) 부부는 “1960년대까지 30여호 살았으나 지금은 저 혼자 고향을 지키고 있다”며 “흥경 선조의 기일(忌日)과 한식 때는 별묘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했다. 경주손씨의 딸 손임이(81) 할머니는 “해마다 한식 때는 전국 각처 후손 수십명이 모여 시제를 봉행한다. 이 때 전통대로 도포에 유건을 쓰고 엄숙한 제의(祭儀)를 행한다”고 말했다.

▲ 선성김씨 재사
재궁마 선성김씨 재사
광창에서 보계2리와 단산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돌고개 방향 골짜기에 선성김씨 재사(齋舍)가 있다. 이 재사는 매학당(梅鶴堂) 김선(金선, 1596~1660)의 묘소 수호를 위해 조선 후기에 건립됐다. 김선은 이조판서를 지낸 김담(1416-1464)의 후손으로 도탄마을 입향조이다. 공은 1625년(인조3)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유, 성균직강, 병조좌랑, 황해도사, 당진현감, 흥해군수 등을 지냈다.

후손 김선우(75)씨는 “이 재사는 ‘ㅁ’자형 목조 기와집으로 규모가 수십칸에 달하는 재사였으나 퇴락이 심해 1960년대 말 철거하고 쓸만한 부재만 골라 현 모습으로 중건했다”고 말했다. 매학당 후손들은 지금도 도탄, 광창, 뿔바우에 살고 있다.

고추대학생, 시장되다

▲ 장욱현 영주시장
보계는 장욱현 시장의 고향마을이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소년 장욱현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상석국교에 다니면서 소꼴 베고 여물 써는 산골소년이었다. 영주중, 영주종고, 경북대를 졸업하고 1977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대통령비서실과 상공부, 대경중소기업청장 등 중앙부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2006년 공직을 마감했다. 그리고 2014년 영주시장이 됐다.

이웃에 사는 김난순(67)씨는 “마을 사람들은 대학생 장욱현을 ‘고추대학생’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부모님과 형님 내외분이 고추농사를 지어 대학을 시켰기 때문”이라며 “공부하다 잠이 오면 찬물에 발을 담궈 가며 열심히 공부한 모범생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째 그리도 슬피 우는지 모두 따라 울었다”며 “참 착하고 효성이 지극했는데 부모님은 시장에 당선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영주 최대 자두마을
광창마을 앞을 지나다 보면 ‘보계자두작목회(회장 정재식)’라는 간판이 보이고, 마을 안쪽에 ‘보계자두집하장’이라 쓴 큰 창고가 있다. 최기동(69) 노인회총무는 “자두작목회는 회원수가 34명으로 영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며 “가구당 평균 600상자 정도 생산하고 있어 연 2만 상자 생산에 총 소득은 4억 원 정도 된다”고 말했다. 보계자두는 당도가 높고 육질이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아 인터넷과 농협을 통해 절찬리 판매되고 있다.

▲ 영월엄씨 효열각
보계1리 사람들
농경사회 때 보계는 근심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보배로운 땅’이었다.

▲ 남정순 농협조합장
이 마을 장관현(68)씨는 “보계는 단산 지역(사천)이나 상석 지역(낙하암천)에 비해 해발이 높지만 물이 풍부하다. 그 이유는 보계곡 여러 곳에서 지하수가 펑펑 솟아오르기 때문”이라며 “보계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태어났고, 보계들에서 생산된 쌀은 밥맛이 좋은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원용(77) 노인회장은 “과거 보계는 글 잘 하는 선비들이 살았고, 지금은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온 마을”이라며 “장욱현 시장과 남정순 농협조합장이 보계 출신이며, 그 외에도 행정·사법고시 3명, 박사 2명, 교수 2명, 교장 2명 등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했다.

김선우 씨는 “광창에는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민규식의 신도비와 그의 어머니 영월엄씨 효열각이 있다. 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날 ‘광창서낭당’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 박옥 할머니
▲ 김원용 노인회장

 

 

 

 

 

▲ 손임이 할머니
▲ 김선우 선성김씨 도유사

 

 

 

 

 

▲ 장관현 씨
▲ 최기동 노인회총무

 

 

 

 

 

▲ 김난순 씨
▲ 허정호 씨

 

 

 

 

 

▲ 김영옥 씨
▲ 손진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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