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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면 감곡2리 (도봉·영모암)

우리마을탐방[108]순흥 안문의 상징 ‘영모암’ 대를 이은 문한의 마을 ‘도봉’

2016. 05. 19 by 이원식 기자

▲ 도봉마을 전경
순흥안씨 선조 묘 중 가장 오래된 묘소
글 잘 하는 선비를 배출한 마을 ‘도봉’

부석면 감곡2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봉화통로로 가다가 상망교차로에서 영광고·부석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영주에서 부석으로 가는 길은 낮은 재를 여럿 넘어야 하는데 그 재의 이름들이 순우리말로 되어 있어 정겹고 흥미롭다.

첫 번째 ‘마근대미재’를 넘으면 진우이고, ‘갈가리재’에 오르면 대마산 목장이 나온다. 또 ‘너운티’를 넘어가면 연이어 ‘배남쟁이재’를 넘게 된다. 그리 높지 않은 재를 네 개 넘어서면 제법 넓은 들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부석면 감곡들이다. 조금 더 올라가다가 보면 도봉솔숲이 보이고, 도봉·영모암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감곡2리 도봉이다. 영모암은 도봉에서 1km 쯤 더 올라가서 야산 속에 숨어있다.

지난 12일 감곡2리 경로회관에서 임영선 이장, 송원태 전 순흥향교 전교, 우병선 노인회장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도봉·영모암의 역사와 지명유래를 듣고 왔다.

▲ 영모암마을 전경
마을의 역사
부석면 지역은 조선시대 때 이부석면, 삼부석면, 도강면 등 3개면이 있었다. 감곡2리 지역은 1413년(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부 도강면(道講面)에 속했다.

순흥지에 의하면 「도강면에는 우수동(愚수洞), 석탄(石灘, 돌탄, 도탄), 각암(角巖), 보계곡(寶溪谷), 문좌곡(文佐谷), 모치방(慕癡坊), 영모암(永慕菴), 도봉(道峯) 등 8개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낙하암천(落霞巖川)을 기준으로 서편에 있는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주군 부석면 감곡리가 되었다가 1980년 영풍군 부석면 감곡리, 1995년 영주시 부석면 감곡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 표석
자연환경
감곡2리는 마구령에서 근원한 임곡천(林谷川)과 미내재(美乃嶺)·자개봉(紫蓋峰)에서 근원한 사문천(沙文川)이 부석에서 합쳐져 낙하암천이 되어 도봉 앞을 흐른다. 또한 붓끝처럼 절묘하게 우뚝 솟은 국모봉(國母峰)이 동남으로 뻗어내려 구릉을 이루고, 대마산(大馬山)과 지장산(智藏山) 낙맥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으며, 문필봉(文筆峰)이 수문장처럼 동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산수 수려하고 평탄 온유한 들이 넓어 옛 선비들이 터를 잡고 풍류를 즐길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풍요의 터다.

▲ 추밀공(안영유)의 묘
지명유래
감곡(甘谷)이란 지명은 감실마을 앞에 ‘감호(鑑湖)’라는 못(池)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풍년농사를 기원하며 못에 물이 가득차기를 하늘에 빌었다. 그때마다 못에 물이 가득차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마을은 윤택해져 기와집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즉 감곡은 감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감곡은 거울 감(鑑)자 감곡(鑑谷)이었으나 일제가 전통마을의 흔적을 없애려고 달 감(甘)자 감곡(甘谷)으로 개칭해 버렸다.

도봉(道蜂)은 마을 양편에 산봉우리가 여럿 늘어서 있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그 가운데로 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봉이라 했다고 전한다. 영주시사에는 ‘조선조 초기 송함(宋涵)이란 선비가 이곳을 개척하여 도부랑(桃浮浪)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조 말엽에 와서 도봉(道峯)이라 개칭했다’고 기록했다.

▲ 영모암
영모암은 옛날 마을 뒷산에 ‘영모암’이란 큰 암자가 있었는데 그 암자의 그림자가 바위모양 같다 해서 영모암(影慕岩)이라 했다는 설과 순흥안씨 후손 안상이 영천(옛 영주)군수로 부임하여 선조(안영유, 안향의 조부)의 묘소를 참배하고 영모암(永慕庵)이란 재사(齋舍)를 지은 후 마을이름이 영모암이 됐다는 설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후자로 알고 있다.

도봉의 야성송씨
부석면 감곡리 국모봉 동쪽 기슭에 세거해온 야성송씨는 선조 때 찰방(察訪)을 지낸 송함(宋涵)이 1560년경 영주 광승에서 옮겨와 터전을 열었다.

▲ 도봉 성황당
조선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록된 송윤(綸)의 아들 진사 석충(碩忠)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자 서간과 저술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영천군 봉향리 광승에 자리 잡았다. 그 후손들이 영주에 뿌리를 내려 크게 번성하였으며, 도봉의 야성송씨도 그 한 갈래이다. 도봉의 야성송씨는 과환(科宦, 과거급제)에 이어 대대로 문한(文翰, 글 잘 하는 선비)이 이어졌다.

조선 영조(1741) 때 송심기(宋心基, 1714년생)는 문과에 급제(1741년)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으며, 가까이로는 송재관(宋在觀, 1850년생)은 영남의 선비로 추앙 받았고, 인박(寅박, 1862년생)·천익(天翼, 1878년생, 학덕과 효행 겸비로 소수서원장 중임, 순흥향교수향장 역임) 부자는 문집을 냈으며, 천익의 아들 맹선(孟善), 상선(商善), 주선(周善)이 각각 유고(遺稿, 남긴 글)를 남겼다.

▲ 도봉의 상징 솔숲
순흥안씨의 상징 영모암
영모암의 주인인 안영유(安永儒, 1201-1233)는 순흥안씨 시조 자미(子美)의 세 아들(永儒, 永麟, 永和) 중 장남이며, 우리가 잘 아는 안향 선생의 할아버지다. 순흥안씨 시조 자미의 묘와 세 아들 중 둘째와 셋째의 묘가 모두 실전되었기 때문에 안영유의 묘는 현존하는 순흥안씨 선조의 묘 중 가장 오랜 된 묘이다.

순흥안문의 상징이 된 이 묘소는 상주인 아들 부(孚, 안향의 아버지)가 14세 때(1233년) 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 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 즉 명당(明堂)이라고 전한다.

▲ 추밀공 신도비
그 후 1588년(명종13년) 영천(옛 영주)군수로 부임한 안상(14世, 安상)이 선조의 묘를 찾아 성묘하고 묘역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몰래 쓴 묘) 흔적이 발견되고 묘봉도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므로 타인의 묘를 제거하고 봉분을 정비한 후 상석 등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형(兄)인 병조판서 안위(安瑋)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새겨 묘비를 세웠으며,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를 올렸다.

‘영모암’이란 시조의 아들 3형제의 돌림자 ‘永’자를 따서 추모의 뜻으로 붙였고, 조상을 추모하는 정신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현재 영모암은 후손들이 성금 5억원을 모아 2015년 12월 중건했다.

▲ 임영선 이장
▲ 우병선 노인회장

감곡2리 사람들
지난 12일 오후 도봉으로 통하는 길가에는 논마다 물이 가득하고 아카시아 향기가 물씬 풍겼다. 임영선(62) 이장은 “감곡2리는 현재 도봉에 25호, 영모암에 15호 등 모두 40여 호가 산다”면서 “예전에는 100여 호가 넘게 살던 마을”이라고 말했다.

순흥향교 전교와 소수서원 도감을 지낸 송원태(84) 선생은 도봉의 지명유래와 자연환경, 야성송씨 입향내력, 영모암의 전설 등 많은 자료를 준비해 주셔서 무한 감사드린다.

▲ 박복남 부녀회장
▲ 한봉수 새마을지도자

우병선 노인회장은 “우리마을 거주 성씨는 야성송씨, 밀양박씨, 강릉함씨, 단양우씨 순으로 세거해 왔으나 지금은 각성이 한마을을 이루어 인심 좋게 오순도순 사는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권영숙(82) 노인회여부회장은 “가마타고 도봉으로 시집와 60년 이상 살았다”며 “새댁시절에는 도포입고 갓 쓴 어르신들이 무서워 골목길 다닐 때는 고개도 못들고 앞만 보고 다녔다. 지금은 남녀노소가 차별 없이 서로 돕고 베풀면서 사는 좋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 송원태 전 순흥향교전교
▲ 권영숙 노인회여부회장
순흥향교와 지역유림에서 축관·장의 등 활동을 하고 있는 송준희(75) 어르신은 “도봉 입향조 송함 선조는 찰방 벼슬을 지냈고, 의병활동에도 참여하셨다”며 “그 후손들이 수백년동안 도봉에 세거하면서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기록이 향토지와 문집에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박복남(53) 부녀회장은 음력 2월 초하루 마을윷놀이를 비롯하여 어버이날 행사, 면민체육대회, 폐품수집 및 분리수거 등 마을 대소사를 주관하여 어르신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 송준희 어르신
▲ 송원섭 한마음작목회장

한봉수(48) 새마을지도자는 젊은 농업경영인으로 ‘축산(소 100여두)전문가’라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 주민들 집에 전기, 수도, 보일러가 고장 나면 신속 출동 수리해 주는 등 ‘든든한 마을의 지킴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정선욱(51)씨와 고준석(54)씨는 이 마을에 귀농하여 마을 사람들과 한 식구가 됐다.

정선욱 원예(채소)작목반 총무는 “주로 가지와 애호박을 생산하여 부산지역으로 출하 한다”며 “연 매출 6억원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작목반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 고준석 반장
▲ 정선욱 원예작목반 총무

 

고준석(반장)씨는 “도시를 탈출해 귀촌에 성공한 것은 마을 어르신들과 선배님들 덕분”이라며 “마을의 화합과 인터넷 판매에도 적극 연구·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로회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 마을 송원섭(69)씨와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 한국 최대 현대식 규모의 재사(齋舍)인 영모암, 안영유의 묘 및 신도비, 회나무, 도봉서낭당 등을 살폈다. 동행한 송원섭씨는 기자와 오랜 친구사이로 진지한 안내와 도움에 고마움을 전한다. 

▲ 부석면 감곡2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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