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오산을 등지고 구계천을 바라보는 마을 ‘오현’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103]단산면 구구1리(오현마을)

오산을 등지고 구계천을 바라보는 마을 ‘오현’

2016. 04. 18 by 이원식 기자

▲ 마을 전경
1750년 달성인 서창재가 개척한 마을
권득평의 천도술잔 후손 제향 시 사용

구구1리 오현 가는 길
영주 서천교사거리에서 순흥·단산(회헌로)방향으로 간다. 귀내-장수고개-판타시온-피끝을 지나 조개섬 회전교차로에서 단산방향(단산로)으로 우회전한다.

▲ 마을 표석
새내-바우 앞을 지나 1Km 쯤 올라가면 병산1리 가기 전 부석면 보계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구구1리 오현’ 표지석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구보교(구구-보계)를 건너면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이 ‘오현’이다.

마을 앞에는 소백산 고치령에서 발원한 사천(옛이름 구계천龜溪川)이 흐르고, 마을의 집들은 오산을 등지고 구계천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 곳곳에 대형 축사들이 많은 것으로 봐서 축산이 번성한 마을로 보인다.
지난 3일 오후 오현 마을회관에서 권오걸 이장, 서석하 노인회장, 서석만 노인회 총무, 변계연 노인회 여성회장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왔다.

▲ 동소나무
역사 속의 오현
이 지역은 1414년(태종 14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 동원면에 속했다. 한일합방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순흥군 일부석면과 동원면을 통합하여 영주군 단산면이라 칭하고, 구고(구두들)·오현(오티)·이목곡(배나무실)을 병합해 ‘구구리’로 개편했다.

단산이란 지명은 조선 때 거유(巨儒) 단곡의 곽진(郭瑨)선생과 병산(甁山, 바우)의 김구정(金九鼎)선생의 동네이름에서 단곡의 단(丹)자와 병산의 산(山)자를 조합하여 단산(丹山)이라 했다.

▲ 가자골
지명유래
옛날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티’ 또는 ‘오현’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오티의 ‘티’자는 고개나 재와 같은 뜻으로 쓰였던 순수한 우리말이다. 오현은 오동나무 오(梧)자에 재 현(峴)자를 쓴다. 우리나라 지명유래사(史)에 비추어 볼 때 ‘오티’라고 부르다가 한자어를 붙여 ‘오현(梧峴)’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 250년 전 오현마을을 개척한 달성인 서창재의 호가 오산(梧山)이다. 당시 선비들은 자신이 사는 마을 이름을 호로 사용한 예로 볼 때 서창재도 이 마을 이름을 호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들 가운데 3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있다. 아마도 이 마을 입향 선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사람들은 동소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지금도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 오산종택
달성서씨 오현 입향
달성서씨 영주 입향조 돈암 서한정(1407-1490)은 단종의 절신으로 계유정란(1453) 때 달성 화원에서 처가 곳인 영주 한성동으로 피난 왔다가 순흥부 등강촌(등영)으로 숨어들었다. 돈암의 6대손 서정구(1663-1735)가 1690년 등영에서 좀 더 나은 환경을 갖춘 새내로 이주한다.

돈암의 9대손 서창재(徐昌載, 1726-1781)가 새내에서 오현으로 살림을 나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니 이때가 1750년경이다. 서창재는 ‘주역’을 읽음에 스승 없이 혼자 대의(大義)를 깨달았으며, 부친상을 당하자 주야로 빈소의 문밖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과거(科擧) 볼 것을 단념하고 ‘심경’, ‘근사록’ 등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오산문집’ 6권 3책이 있다. 현재 오현에는 오산종택이 남아 있으며 후손 6가구가 살고 있다.

▲ 천도술잔
효자 권득평과 천도술잔
권득평(안동권씨, 1407-미상)은 옛 순흥부 동원면 등영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았다. 1462년 17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세에는 뜻이 없고 강학과 어버이 봉양에만 힘썼다. 부친이 병이 위중하여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때가 이른 봄이라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 ‘하늘에 기도’하고 하염없이 냇가를 오르내리던 중 얼음장 밑으로 푸른 잎사귀가 떠내려 오기에 건져보니 엄청나게 큰 복숭아 한 개가 있었다.

그는 하늘에 감사드리고 부친께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는 일화다. 득평은 이 복숭아씨로 잔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한 개는 풍기군수가 가지고 가고 한 개는 안동권씨 수중파(守中派) 후손들이 제향 시 술잔으로 쓰고 있다. 현재 이 잔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마을 출신 권기홍(48, 서울)씨로 구구1리 권오걸 이장의 조카다.

▲ 마을회관
안동권씨와 양천허씨
오티에 살고 있는 안동권씨는 수중파(守中派) 창택계 후손이다. 후손 권오걸 씨는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낸 계상(繼常, 1726-미상) 선조께서 등영에 살다가 오현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계상 선조께서 벼슬을 마치고 오셨다면 1760년 이후로 추정되며, 약 250년 전으로 보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오현에 사는 양천허씨는 띄기 입향조 허윤공(許允恭, 1414-미상)의 후손으로 오현으로 이거한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 허업(59)씨는 “띄기에 살다가 오현으로 이거한 것은 10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며 “저의 증조부, 조부 묘소가 보계리에 있는 것으로 봐서 조부 또는 증조부 때 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100-120년 전(1900년경)으로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베다니집
세상에 감동 준 베다니집
오현마을 뒷골 하남실에 베다니집(원장 오경실)이 있다. 1984년 박명현 목사 부부가 이 마을에 베다니교회를 개척하고, 1990년 베다니집을 설립해 소외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권오걸 이장은 “베다니집이 지역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정 공동체를 이뤘기 때문”이라며 “지체장애인 등 각기 다른 형편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형제처럼 가족애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에 감동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 젖소농장
축산으로 부농이룬 마을
이 마을도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가난한 농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찍이 새마을시대(1970) 때부터 한우 사육을 시작하였고, 1980년경부터는 젖소를 키워 우유를 생산하는 등 축산 선진마을이다. 요즘 DHA가 들어간 ‘아인슈타인 우유’가 인기다. 머리가 좋아진다고 해서 유아기(0-6세)에 많이 먹인다.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우유가 바로 DHA가 함유된 ‘아인슈타인 우유’다. 젖소농장을 경영하는 서석만(70)씨는 “아인슈타인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DHA 성분 사료를 먹여야 하고, 우유 검사 결과 DHA 성분이 1% 이상 나와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여기서 생산된 우유는 남양유업 경주공장으로 납품한다”고 말했다.
현재 마을에는 한우 400두, 젖소 200두를 사육하는 축산마을이다.

▲ 오현마을 사람들
오현마을 사람들
서석하 노인회장은 “오현에 입향한 서창재 선조는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였다”며 “선조의 향학정신을 이어받아 서석봉(대령) 육사교수, 서석홍 교장, 서동석 중소기업은행장, 서석태 헌병중령, 중앙부처 간부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말했다.

이영수(62) 새마을지도자는 “우리 마을에는 50대에서 60대 초반 젊은 농업인이 많다”며 “벼농사, 축산, 딸기, 약초, 체리 등을 재배해 소득을 많이 올린다”고 했다.
안기호(79) 전 노인회장은 “오현의 순흥안씨는 6·25 전 안정면 여륵동 탑골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해 왔다. 안선호(87) 형님과 두 집이 산다”고 했다.

정예자 전 부녀회장은 “우리 마을 회관은 영주에서 가장 넓은 거실을 가졌다. 우리마을은 영주경찰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데 정월보름날은 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간부 20여명이 와서 함께 윷을 논다”고 자랑했다.

봉화 거촌에서 가마타고 시집왔다는 김차긴(88) 할머니는 “가마길이 멀어 가마꾼이 2조로 나누어 40리를 메고 왔다. 오다가 보니 큰집이 보이 길래 ‘저집이 시집인가?’ 좋아했더니 그 집은 학교였다. 마당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리니 초가삼간 작은 집이 보여 실망했다”며 웃는다.

변계연(86) 여 노인회장은 “60년 전 우리농촌은 의식주를 자급자족해야 하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가난의 시대였다”며 “지난 50년 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고 했다. 박찬옥(80) 할머니는 “예전에 빨래할 때는 잿물을 받아썼고, 떡골비도 손으로 비볐으며, 기왓장 가루로 놋그릇을 닦았다”면서 “치솔, 치약도 없이 살았으니 원시시대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부석 감곡으로 시집갔다가 다시 친정 곳으로 살러 왔다는 서석기(90)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고생고생 말로 다 할 수 없다”며 “지금은 잘사는 나라가 되어 노인들을 잘 보살펴 주니 고맙다”고 했다.

▲ 서석하 노인회장
▲ 권오걸 이장

 

 

 

 

 

 

▲ 이영수 새마을지도자
▲ 변계연 노인회 여회장

 

 

 

 

 

 

▲ 정예자 전 부녀회장
▲ 안기호 전 노인회장

 

 

 

 

 

 

▲ 서석기 할머니
▲ 서석만 노인회 총무

 

 

 

 

 

 

▲ 박찬옥 할머니
▲ 김차긴 할머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