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영주 최초의 학교, ‘소흥학교’가 봉서루에서 개교했다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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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100]순흥면 지동3리(구학교·호방골)

영주 최초의 학교, ‘소흥학교’가 봉서루에서 개교했다

2016. 04. 02 by 이원식 기자

▲ 호방골 전경
1906년 봉서루 2층을 교실로 개교
호방골은 옛 순흥부 방송국 역할

구학교·호방골 가는 길
영주시내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방향으로 향한다. 귀내-장수고개-판타시온-동촌1리 피끝마을 앞을 지난다. 동촌2리 조개섬 회전교차로에서 ‘선비의 고을’ 순흥면으로 접어들면 드넓은 대평(大坪)들 멀리 소백산 국망봉이 보이고 순흥의 주산인 비봉산이 가깝다.

순흥으로 들어가면서 첫 번째 마을이 지동2리 밤쏘(율림)이고, 1km 가량 더 올라가서 두 번째 마을이 지동3리 구학교와 호방골(呼榜谷)이다. 구학교터 지역을 소래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학교와 교회가 있었다.

지난 13일 오후 지동3리 봉서루 솔숲에서 박수훈 이장, 강인호 어르신, 조용장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구학교의 설립 내력과 호방골의 유래를 듣고 왔다.

▲ 호방골 골목길
마을의 역사
1849년에 편집된 순흥지에 보면 고을의 이름이 급벌산(급伐山), 급산(급山), 흥주(興州), 순정(順政), 흥녕(興寧), 순흥(順興)으로 바뀌어 왔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은 순흥도호부 대평면에 속했다. 당시 대평면(大平面)에는 아신(衙薪, 관아, 면사무소 인근), 성하리(城下里, 순흥초 부근), 위야곡(渭野谷, 옛 향교), 사현정(四賢井), 석교(石橋), 신촌(新村), 산파(山坡, 산파단), 죽동(竹東), 세포(細浦), 묵동(墨洞), 태장(台庄), 한산동(漢山洞) 등이 있었다. 위에서 볼 때 봉서루 지역은 산파리(山坡里)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구학교 마을
지명 유래
이곳의 원래 지명은 ‘웃밤쏘’였다. 이곳을 ‘구학교(舊學校)’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06년 이곳에 영주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화재로 소실된 후 읍내리로 이전해 가자 학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구학교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방골(呼榜谷)은 옛 순흥부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과 부의 행사를 알리는 방송통신을 담당하던 마을이다. 당시는 방(榜)을 써 붙이거나 북소리나 징 소리로 부의 소식을 부민들에게 알렸는데 이러한 일을 이곳에서 했다하여 ‘호방골’이라 했다한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순흥부 때 이곳에 육방관속 중의 하나인 호방(戶房)이 관장하던 양곡창고가 있었다하여 호방골(戶房谷)이라 했다는 유래도 전해지고 있다.

호방골 조용장(71) 어르신은 “당시 이 지역은 순흥부 중심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징을 치면 읍내리, 석교리, 지동리까지 잘 들렸다”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방송국 역할을 했던 호방골(呼榜谷)이 진짜 마을의 유래”라고 말했다.

▲ 봉서루
천년 누각 봉서루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천년 누각 봉서루(鳳棲樓)가 순흥면 지동3리 구학교터에 있다.

봉서루는 고려 때 건축된 누각이다. 여말선초 때 흥주(興州)의 남쪽 관문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마중과 배웅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 비봉산에 사는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 진다하여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웠다 한다.

당시 순흥 사람들은 누각의 앞쪽에 ‘봉서루’라는 현판을 걸어 봉황을 맞이하여 깃들게 하였고,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의 현판을 걸었다.

▲ 봉란석(봉의알돌)
1906년 영주 최초의 학교인 소흥학교가 봉서루에서 개교했는데 1929년 학교 증축 공사 중 화재로 학교가 소실되는 바람에 면사무소 자리로 옮겼다가, 2006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봉서루의 원래자리는 현재 자리에서 50여m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봉서루가 들어선 주변에는 알봉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또한 봉황의 알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봉서루’라는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으나 ‘흥주도호부아문’이라는 현판은 공민왕이 몽진 때 쓴 친필로 알려져 있다.(현재는 없음)

▲ 옛 봉서루 자리
최초 학교 봉서루서 개교
구한말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고 일본이 침략의 마수를 뻗기 시작할 무렵 고종은 ‘흥학훈령’을 발표한다. 이에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신태휴에 의해 근대학교 설립이 추진됐다.

1906년 4월 7일 정재학 군수가 향리의 유지들과 힘을 모아 영주에서 최초로 ‘흥주소학교’를 설립하고 봉서루에서 개교하게 된다. 그해 후임 김창수 군수가 부임하여 소수학풍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소수서원의 소(紹)자와 흥주의 흥(興)자를 따 사립 소흥학교(紹興學校)로 개칭했다. 순흥초 연혁지에 따르면 ‘순흥면 지동리에 있던 봉서루를 교사(校舍)로 사용했다’라고 기록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도 봉서루 앞에 살고 있는 강인호 어르신은 “당시 서당교육에서 학교교육이 도입되면서 마땅히 교실로 쓸만한 건물이 없어 봉서루를 교실로 사용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1911년 일제에 의해 소흥학교가 폐교되고, 순흥공립보통학교로 재개교하게 된다. 그러다가 1929년 교실 증축 공사를 하던 중 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 교사가 소실되는 바람에 이듬해 1930년 8월 읍내리(현 순흥초)로 이전하게 됐다.

순흥초등학교는 2006년 4월 7일 졸업생, 재학생, 지역 주민 등 1천 500명이 모여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 미륵당
소래들과 대평들
봉서루가 있는 주변을 ‘소래들’이라 하고 흥주벌 가운데 가장 넓은 들을 ‘대평들’이라 한다.

구한말 서구문물이 들어올 때 기독교도 따라 들어왔다. 1906년 봉서루에 현대학교가 개교되고 이어서 예배당도 이곳에 세워졌다. 그래서 ‘야소교(耶蘇敎)가 처음으로 전래(傳來)된 곳’이라 하여 야소교의 소(蘇)자와 전래의 래(來)자를 따 ‘소래(蘇來)들’이라 했다 한다.

또한 봉서루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넓게 퍼져있는 들이 대평들이다. 그래서 조선 때 이 지역을 순흥부 ‘대평면’이라 했다. 1907년 소래들에 세워졌던 ‘대평교회’는 학교 화재 때 소실되고, 1930년 경 읍내리로 옮겨가서 순흥교회가 됐다.

▲ 지동3리 경로당
지동3리 사람들
봉서루 주변에는 천년 수령의 소나무 수십 그루가 장관(壯觀)을 이룬다. 박수훈(64) 이장은 봉황알돌(鳳卵石)을 가리키며 “예전에 이곳에 봉황이 깃들어 살 수 있도록 ‘솔’과 ‘오동’을 심었던 장소이며, 이 봉란석(지름 2m)은 땅에 묻혀있던 것을 2004년 발굴하여 현 위치에 모아 놓았다”고 말했다.

이 마을 원로 강인호(93) 어르신은 “어릴 적 소흥학교가 불타는 것을 봤다”고 하면서 “그 후 읍내리로 이전한 순흥보통학교에 다녔다”고 말했다.

권명준(76) 노인회장은 “지금 호방골에는 33가구에 5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며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고, 독거노인이 많다”고 말했다.

김신영(78) 어르신은 “이곳은 들이 넓고 물이 풍족해 농업이 발달한 마을”이라며 “일할 사람이 줄어들면서 지금은 최신형 농기계가 개발돼 사람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언덕 위에 하얀집을 짓고 사는 차옥순(75) 할머니는 “예전에는 모두 초가집에 살면서 벼농사 중심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고추, 깨, 콩, 땅콩 등 밭농사와 복숭아 농장이 많다”고 말했다.

박미화(73) 할머니께 마을의 자랑을 물었더니 “우리마을은 소나 돼지 등 축산이 없는 청정마을”이라며 “이는 마을 사람들이 깨끗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박화분(80) 할머니는 손수 경운기를 몰고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22살에 호방골로 시집와 60년을 살았다”며 “농사는 거짓말을 안 한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했다.

서순교(65) 부녀회장은 “호방골 사람들은 인정이 많다. 출향인들로 구성된 호동회는 매년 어버이날이 들어있는 주말에 고향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연다. 그런데 대접받을 어르신들의 수가 점점 줄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봉서루 솔숲에 녹색을 사랑하는 녹색 시인이 산다. 그가 바로 녹색사관학교 정옥희(55) 교장이다. 정 교장은 “자연은 아름답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연이기 때문”이라며 “자연은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라고도 했다.

봉서루 서쪽에 연대를 알 수 없는 미륵당이 있고, 봉서루 뒤에 최근에 생긴 꼬막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박 이장이 설명했다.

<순흥면 지동3리 구학교·호방골 사람들>

▲ 권명준 노인회장
▲ 박수훈 이장

 

 

 

 

 

 

▲ 강인호 어르신
▲ 서순교 부녀회장

 

 

 

 

 

 

▲ 김신영 어르신
▲ 박화분 할머니

 

 

 

 

 

 

▲ 박미화 할머니
▲ 차옥순 할머니

 

 

 

 

 

 

▲ 정옥희 시인
▲ 조용장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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