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효충(孝忠) 정신 이어가는 미울마을 사람들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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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99] 장수면 소룡2리(미울마을)

효충(孝忠) 정신 이어가는 미울마을 사람들

2016. 03. 18 by 이원식 기자

▲ 미울마을 전경
산과 들과 호수가 어우러진 명당 터
효자 정도창·독립투사 김재명의 비(碑)

▲ 마을 표석
장수면 소룡2리 미울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가흥교를 건너 예천방향으로 가다가 두전교차로에서 내려 장수면 소재지로 간다. 면소재지 입구에서 반구교로 좌회전하여 옥계천 강변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가다 보면 곰실-토계-호구실 앞을 지나게 되고, 조금 더 내려가면 길가 우측에 「소룡2리 미울」이라고 새긴 마을표석을 만나게 된다. 미울로 들어가는 길은 좌회전이다.

멀리서 마을을 바라보니 봉미산을 등지고 옥계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터에 들이 넓다. 아마도 옛 선비들은 이런 곳에 터를 잡아 시를 쓰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 앞에는 경북선 건널목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고, 마을 뒤로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집들은 봉미산 자락 아래 눈썹모양으로 길쭉하게 자리 잡았고,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도 보인다. 지난 10일 미울에 갔다. 박성서 이장, 김동일 노인회장, 이영란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효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추억의 건널목
미울마을의 역사
취사 이여빈이 1625년에 쓴 최초의 영주지에 의하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 때 영천군 서부지역 호문송리로 서면에 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주읍지(괴헌고택본)에 보면 「호문송리의 속방(屬坊)은 웅곡방(곰실), 배탄방(보통골), 소룡산방, 후동방, 토계방, 기동방, 며전구방(호구실), 산미흘방(미울), 화기방 등 9개방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산미흘방(山彌屹坊)이 미울이다. 그 뒤 조선 영조(英祖, 1720년경) 이후에는 ‘호문송리 산미흘방’이 ‘호문송면 산미흘동’으로 개칭되어 면과 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순흥군, 풍기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호문송면과 두전면을 합하여 ‘장수면’이라 했으며, 산미흘리(미울), 소룡산리, 며전구리(호구실)를 통합하여 ‘소룡리’라 했다. 아마도 소룡산이 있는 지역이라 하여 ‘소룡리’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영주시 장수면 소룡2리로 50가구에 70여명이 산다.

▲ 동수나무
미울의 지명유래
조선시대 때 마을 이름은 호문송면(好文松面) 산미흘동(山彌屹洞)이었다. ‘미흘’은 두루 미(彌)자에 산 우뚝솟을 흘(屹)자를 써 ‘미흘’이라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미울’이라고 부르게 됐다. 아마도 ‘미흘’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미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영주시지(2010)에 보면 「약 400년 전 정도창 이란 선비가 마을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 마을 뒷산이 봉미산(鳳美山)이고, 마을 앞은 시내가 합수하여 호수(湖水)를 이루니 봉미산의 미(美)자와 호수의 호(湖)자를 따서 미호(美湖)라 했다」라고 했다.
‘미흘’이 변하여 ‘미울’이 됐는지, 미호가 변하여 ‘미울’이 됐는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둘 다 아름다운 이름이다.

▲ 정도창 효자비
정도창의 효자비
400여 년 전 이 마을에 천석꾼 정삼성(鄭三省, 연일정씨, 정몽주의 후손)이란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솟을 대문이 있고, 연당(蓮塘)까지 있었다고 하니 대단한 부자였다. 어느 날 도둑떼가 들어 정삼성은 도둑의 모해(謀害)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16세였던 정삼성의 아들 정도창(鄭道昌, 1607-미상)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 11년동안 상복를 벗지 않은 채 장가도 들지 않았으며, 가사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원수 찾기에 골똘하여 마침내 도적의 무리를 찾아 처단하고야 말았다.

정도창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학사 김응조는 이 사실을 전(傳)으로 지어 그 전말을 상세히 서술하고, 바위에 효자리(孝子里)라 새겼다. 그 뒤 관찰사 임의백(任義佰)이 이 전을 보고 조정에 보고하니 마침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미울마을 초입에 정도창의 효자비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정효자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정월 25일날 효자계를 연다. 이 마을 박승국(88) 원로는 “정도창의 효자비는 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문화재이지만 아직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해 안타깝다”며 “효자비의 내력과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밝혀 문화재 지정을 서두르자”고 말했다.

박승은(84) 어르신은 “정효자비는 마을의 상징이자 자랑”이라며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수백년 전부터 효자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 의사 김재명의 기념비
의사(義士) 김재명
효자각과 100여m 거리를 두고 의사(義士) 김재명(金載明, 의성김씨, 1885-1977)의 기념비가 있다. 김 의사는 이 마을 출신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15년 형을 살아, 애국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김 의사는 1910년 5월 안동군 북후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적 수 명을 사살하고 출동하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영주예천 등지를 주무대로 활동한 독립투사다.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안동의 사립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습격하였고, 출동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해 12월 영주군 평은면에서 일본군에게 피체(被逮)되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1990)을 추서하였으며, 이 기념비는 1993년 후손들이 세웠다. 그의 아들 김기수·응수 씨는 수년전 작고하였고, 둘째 며느리 장순모(71)씨가 미울에 살고 있다.

김동일(79) 노인회장은 “우리 마을은 정도창과 같은 효자가 살았고, 김재명과 같은 의사도 살았다”며 “그래서 미울을 ‘효충의 마을’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 옛 미룡간이역
미룡역의 추억
마을 앞으로 경북선(철도)이 지나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건널목에서 장수방향 150m 지점에 넝쿨에 덮힌 창고 같은 건물이 하나가 있다. 옛 미룡역이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국회의원 ‘빽’까지 동원하여 간이역을 유치했다고 한다.

1967년 임시승강장(미룡리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을 때 학생 100여명이 통학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 농촌인구 감소와 육상 교통의 발달로 승객이 줄어 1984년 승차권 발매가 취소되고, 1998년 시내버스가 들어오면서 여객 취급이 중단됐다. 이 마을 출신 4-50대들은 “학창시절 간이역에 대한 추억이 많다”고 했다.

▲ 미을노인회관
미울마을 사람들
철도 건널목을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첫 머리에 만나는 건물이 미울노인회관이고 맞은편에 소룡보건진료소가 있다. 미울경로당은 40여년전(1970년대 말)에 지은 건물로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세워진 회관이다. 보건진료소 또한 1981년 영주시에서 최초로 13개 보건소를 설치할 때 건립됐다가 2012년 현 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경로당 뒤에 팔우대(八愚臺)란 바위가 있다기에 박성서(56) 이장의 안내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올라가 봤다. 예전에 이 마을에 여덟 성(姓)이 살았는데 ‘화목하게 잘 살자’는 뜻에서 새겼다고 한다.

이영란(61) 부녀회장은 “오늘이 정월 25일 효자곗날이다. 이 마을에 시집 와 살면서 정효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마을사람들이나 출향인들 모두 효성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 효자계 모임
경로회관 안방에서 만난 오원정(83)·김순현(77) 할머니는 “경로회관은 겨울에는 따뜻한 쉼터이고, 여름에는 무더위 쉼터”라며 “마을에 노인들이 많아 매일 10-15명씩 모여 서로서로 돌보기도 하고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이 마을 백수강(74) 어르신은 제3회 대구 전국한시대회에서 장원을 하는 등 5회에 걸쳐 전국대회 장원상을 받은 한시인이자 영주를 빛낸 선비다. 백씨는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자이신 박승기 선생으로부터 동몽선습과 시전을 사사받았다”며 “지금은 소남한시회에서 서로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미울교회
마을에 작은 교회가 보인다. 돌을 쌓아 지은 교회 건물과 종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교회 머릿돌에 1963년 4월 5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마을 신도들이 돌을 다듬고 쌓아 지은 교회라고 박성서 이장이 설명해 줬다.

우병창(59) 새마을협의회장은 “정효자비각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 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않아 안타깝다”며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면 그것을 근거로 다시 재신청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희석(83) 어르신은 “봉미산 중턱에 정도창의 묘로 추정되는 규모가 큰 묘가 있었는데 중앙고속도로 공사 때 없어졌다”고 하면서 “정효자는 천석꾼 부자이고 큰 선비였으나 후손이 없어 묘 이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김동일 노인회장
▲ 박성서 이장

 

 

 

 

 

 

▲ 우병창 새마을협의회장
▲ 이영란 부녀회장

 

 

 

 

 

 

▲ 박승은 어르신
▲ 박승국 어르신

 

 

 

 

 

 

▲ 백수강 어르신
▲ 전희석 어르신

 

 

 

 

 

 

▲ 김순현 할머니
▲ 오원정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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