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소고 박승임 선생이 소요(逍遙)하던 ‘하한정(夏寒亭)’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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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94]가흥1동 한정마을

소고 박승임 선생이 소요(逍遙)하던 ‘하한정(夏寒亭)’

2016. 02. 05 by 이원식 기자

▲ 한정마을 전경
한정의 입향조는 소고의 아들 박록
새마을운동의 선구자 정명규 할머니

가흥1동 한정마을 가는 길
한정마을은 연화산 가는 길목에 있다. 신영주 남부육거리에서 현대아파트 방향으로 가서 비달고개(별달고개, 星月峴)를 넘으면 서천이 펼쳐진다.

한정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한정공원 사이로 난 마을길을 따라 200m 가량 들어가면 한정마을이다. 가흥2교를 건너 시민운동장을 지나 오작교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가는 길도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새마을시대 집들과 현대식 주택이 섞여있다. 마을에는 400년 수령의 향나무와 동수나무, 삼락당, 소고대 등이 있어 400년 역사를 간직한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 삼락당
지난달 16일 오후 한정마을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송도선 노인회장, 한미경 반장, 정명규 새마을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한정마을의 역사와 새마을운동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한정마을
영주지(榮州誌)에 보면 「옛 영천군(영주의 옛 이름) 읍내 지역에는 봉향리, 망궐리, 가흥리, 산이리 등 4개리가 있고, 가흥리에는 초곡방, 반곡방, 이현방, 대사방 등 8개 방이 있었는데 초곡방이 한정마을이다」라고 기록했다.

▲ 소고 향나무
한정마을은 조선 초기에 영천군 가흥리 초곡방(草谷坊:푸실)이라 부르다가 영조 이후에는 영천군 가흥면 초곡리라 칭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문정동이 되었다가 1980년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가흥1동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제방과 철길, 자동차전용도로 등으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됐지만 예전에는 맑게 흐르는 서천과 하얀 모래밭이 어우러져 풍광이 아름다웠을 것으로 상상된다. 현재는 가흥1동 14통에 속해 있다.

▲ 영주 최초 마을회관
지명 유래
예전에 서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산이리 초곡방(사일)이 있고, 맞은편 서쪽에는 가흥리 초곡방(한정)이 있었다. ‘초곡’이란 수풀이 무성하다는 뜻이다.

조선 중종 무렵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아들 박록(朴록, 1542-1632)이 초곡(푸실)에 터를 잡고 정자를 세우니 그의 아버지 소고가 하한정(夏寒亭)이라 명명했는데 이때부터 초곡의 마을이름이 하한정(여름에도 시원하다)이 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하(夏)자는 생략되고 한정(寒亭)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곳을 문정동이라 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글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많아서 글밭이라는 뜻의 문전(文田)의 문(文)자와 한정(寒亭)의 정(亭)자를 조합하여 문정(文亭)이라 했다.

▲ 동수나무
한정 입향조 박록
한정의 입향조는 소고의 장남 박록이다. 원래 원당(지금 원당천)에 살았는데 초곡(현 사일)에 사는 김해 허씨 가문에 장가들면서 처가집 가까운(서천 건너) 초곡(현 한정)에 살림집을 마련하게 됨에 따라 입향조가 됐다. 초곡은 퇴계의 처가이기도 하다. 퇴계는 21세 때인 1521년 영주 초곡(草谷, 사일) 김해 허씨 진사 허찬(許瓚, 1481-1535)의 맏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박록은 허찬의 손녀와 혼인함으로써 퇴계는 박록의 처고모부가 됐다. 박록의 장남 회무(朴檜茂, 육우당)와 차남 박종무(朴종茂, 삼락당)를 하한정에서 태어나 회무는 원당 본가로 갔다가 귀내에 정착했고, 종무는 하한정에 뿌리내림으로써 하한정은 소고 후손들의 본산이 됐다.

삼락당과 향나무
한정마을 가운데 삼락당과 향나무가 있다. 소고의 후손 박찬동(75) 어르신은 “삼락당은 소고 선생의 손자 삼락당(三樂堂) 박종무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38년 후학들 세웠다”고 했다.

▲ 경로당 할머니들
소고는 번잡한 곳(원당)을 피해 이곳에서 연화산(蓮花山)을 소요(逍遙, 거닐다)하며 만년을 보내던 곳이기도 하다.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하여 하한정이라 명명했다고 하니 이곳은 소고가 가장 아끼던 곳임이 틀림없다. 삼락정 앞에는 소고가 심은 향나무가 한 그루 있다. 말을 매어두기도 했다는 향나무다. 이 향나무는 예천 처갓집(처삼촌이 울릉도에서 가지고 온 3그루 중 1그루라고 전함)에서 옮겨다 심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 박춘서(70)씨는 “소고 선조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쉴 때마다 하한정에 머물렀는데 그 때마다 영남의 유생들이 배움을 청하여 이곳으로 몰려왔다”고 전했다.

소고대(嘯皐臺)

▲ 20-40년전 정명규 할머니
소고대는 한정 마을의 초입에서 마을을 둘러보면 마을의 좌측 야트막한 언덕위에 몇 그루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소고가 원당에 살 때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과 조용함을 택하여 만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소고대는 소고가 평소 자주 거닐던 옛 하한정 터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72년에 건축한 대(臺)다. 이 대는 벽이 없고 지붕만 덮여있어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서천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소고대는 당초 원당리에 있었는데 이곳 한정마을로 옮겼다가 무너진 후 다시 중건했다. 소고대는 선생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소고대 앞에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대를 지키고 있다.

새마을운동 선진마을
이 마을에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선구자 정명규(85) 할머니가 산다. 소고가의 며느리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정 할머니가 40대일 때 한정마을 새마을부녀회장으로 일했다. 정 할머니는 1976.12.13 대전에서 열린 전국새마을대회에서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발표하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대통령 표창장도 받았다. 당시 마흔여섯이었던 정 할머니는 전국 공무원연수원을 순회하면서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강의하여 새마을운동 유명강사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정 할머니는 “그 당시 마을회관 짓는 일부터 시작하여 구판장 사업, 밤나무 묘목 재배, 절미운동, 마을 앞 다리 놓기, 길 넓히기, 시멘트 담쌓기, 창고 짓기 등 영주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정 할머니는 “당시 함께 활동했던 김옥순(83), 권오인(80), 김귀순(80)은 지금도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고, 두 사람은 요양원에 가 있다”면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 경로당 할머니들
한정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 경로당에 갔을 때 할머니 10여분이 만두를 만들고 있었다. ‘무슨 만두냐?’ 물었더니 “겨울에는 늘 이렇게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경로당이 참 따뜻하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송도선(76) 노인회장은 “한정은 예전에는 소고 선생으로 유명하고, 새마을시대 때는 정명규 새마을운동가로 이름을 날리고, 지금은 ‘행복한 경로당’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 송도선 노인회장
▲ 한미경 반장
▲ 정명규 할머니

 

 

 

 

 

 

 

한미경 반장은 “한정에는 현재 20가구에 4-50명 정도 살고 있고, 마을 위 리치마을에 6가구가 집을 짓고 있다”고 하면서 “마을 어르신들은 훌륭한 선조(소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한 치의 부끄럼 없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 김옥순 할머니
▲ 권오인 할머니
▲ 김귀순 할머니

 

 

 

 

 

 

 

새마을운동에 동참했던 김옥순 할머니는 “향나무 맞은편에 있는 시멘트벽돌 건물이 우리가 지은 마을회관”이라며 “영주에서 처음 지은 마을회관 1호이기 때문에 역사에 남겨야 하고 잘 보존해야 된다”고 말했다. 권오인 할머니는 “당시 남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판장 일, 나무심기 등을 했는데 어렵고 힘든 만큼 보람도 컸다”고 말했다.

김귀순 할머니는 “예전에 배고프고 서러울 때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벼가 나와 보릿고개가 없어졌다”며 “당시 통일벼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창고가 지금도 마을에 보존돼 있다”고 했다.

▲ 전차순 할머니
▲ 권영낭 노인회 총무
▲ 이미자 씨

 

 

 

 

 

 

권영낭(76) 노인회 총무는 “지금 마을의 자랑은 따뜻한 경로당이 있는 것”이라며 “공동주거 형식으로 식사도 같이하고 서로 챙이고 의지하면서 산다”고 말했다.

▲ 박찬동 어르신
전차순 할머니는 “예전에 마을구판장 운영할 때 물건을 머리에 이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니며 힘들게 살았다”고 했고, 이미자(68)씨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니며 불편하게 살았는데 형님들이 새마을운동으로 시멘트 다리를 놓아 생활이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소고 후손의 딸인 박경자씨는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유교(儒敎)를 이어가지 못해 부끄럽다”며 “그러나 늘 마음속에 조상이 있고, 그 뜻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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