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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92]봉현면 노좌2리(사리미)

전국 최고 소득의 사과마을 노좌2리 ‘사리미(士林)’

2016. 01. 15 by 이원식 기자

▲ 노좌2리 전경
고려말 풍기진씨가 터 잡은 역사의 마을
마을 평균 1억 소득, 3억 소득도 2집

봉현면 노좌2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죽령방향으로 향한다. 풍기에서 내려 봉현회전교차로에서 풍기 IC방향으로 우회전한다. 봉현초 앞을 지나 히티재 방향으로 올라가면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답게 산천이 모두 사과나무다.

▲ 노좌2리(사리미)표석
히티재를 넘으면 유전리 ‘꽃피는 산골광장’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노좌1리이다. 노좌1리에서 노좌2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노좌2리 사리미·새마」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표석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500m 쯤 올라가면 산자락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사리미’마을을 만난다.

지난 3일 사리미 마을에 가서 진홍대 이장, 진홍섭 노인회장, 정옥남 부녀회장 그리고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사과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기록으로 본 노좌리
1849년경 발간된 풍기군지에 보면 이 지역은 풍기군 노좌리면이었다. 「노좌리면(魯佐里面)은 관문에서 남쪽으로 30리까지이다. 유음리, 이전리, 대촌리, 하촌리가 있으며 안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노좌리면과 와룡동면을 통합하여 봉현면이라 칭했다. 이때 봉현면이 처음 생겼다.

‘봉현’이란 명칭은 “한천리에 있는 봉정지(鳳停地)의 봉(鳳)자와 고개 현(峴)자를 따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각종 문헌에 나타난 진중길의 기록에 의하면 「풍기진씨(시조 진필명) 18대손 진중길(秦中吉, 1308~?)이 고려 충숙왕(재위:1313~1330)·충혜왕(재위:1330~1332) 때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또 「진중길은 1308년(충렬왕 34) 기주(基州, 풍기) 남쪽 노좌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노좌의 역사는 700여년으로 추정된다.

▲ 옛 노계서원 터
지명유래
노좌2리를 ‘사리미’라고 부른다. 진홍섭(76) 노인회장은 “예전부터 이 마을에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살아 사림(士林) 또는 사림리라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발음하기 좋게 ‘사리미’로 부르게 됐다”고 했다.

영주시사에는 「고려말 진중길이 마을을 개척했다. 개척 당시 뒷산 형세가 ‘白’자 모양이어서 백산이라 칭하고 마을을 백산동이라 했다. 그 후 조선조 말에 김경업(金敬業)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명현거유(明賢巨儒)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사림리(士林里)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 노좌2리경로당
황종환(77) 노인회부회장은 노좌의 유래에 대해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이 ‘주마산(走馬山)’이고 산 밑에 마부가 살았다고 하여 종 노(奴)자를 써서 노자(奴者)라 부르다가 약 300년 전 진성이씨 경활이라는 선비가 마을 이름이 상스럽다 하여 노좌(魯佐)로 개칭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노좌의 노(魯)자와 노계의 노(魯)자는 ‘노나라 노(魯)자’를 쓴다. 아마도 추로지향(鄒魯之鄕)에서 노(魯)자를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 행정
노계서원의 후예들
지금은 노계서원이 노좌1리에 있지만 원래 사리미 마을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진홍섭 노계서원 도감은 “노계서원(魯溪書院)은 노좌2리 사리미 마을 뒤쪽에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되고 그 후 종중들이 성금을 모아 2005년 현재 위치(행정 자리)에 복원했다”면서 “노계서원은 이 고을 선비들이 풍기진씨 현조인 행정 진중길 선생과 청주한씨 추월당공파 파조인 한산두 선생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라고 설명했다.

진 도감은 또 “노계의 후예들은 현대교육이 시작된 후에도 죽헌 권오걸, 옥동 신재봉, 금곡 안경칠 선생 등이 서당을 운영하면서 노계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 경로당 사람들
6.25 때 폐허된 마을
마을 어르신들이 들려준 6.25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51년 1.4후퇴 무렵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 3천 500명이 소백산 지역에 숨어 있다가 사리미로 집결했다. 어느날 패잔병들은 학가산으로 간다며 안정면 여륵리 무릎재 방향으로 이동했다. 인민군이 마을을 떠난 후 미군기가 마을을 폭격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에 대해 진홍섭 어르신들은 “당시 미군은 이 마을에 패잔병들이 그대로 있는 줄로 알고(잘못된 정보 입수로) 마을을 포격한 것으로 안다”면서 “미군이 짚단에 불을 붙여 지붕 위로 던졌는데 초가집은 모두 불타고 행정(진중길의 정자)은 기와집이라서 화를 면했다”고 했다.

당시 11살이었던 이기순(77) 할머니는 “그 때 마을 사람들은 뒷산 굴속으로 피난해 화를 면했다”며 “인민군들은 그 길로 다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최고 소득의 사과마을
마을 입구 동수나무 앞에 사과마을을 상징하는 표석이 있다. 사과를 머리에 이고 있는 표석에는 ‘당도 최고, 맛도 최고, 품질도 최고 노좌2리’라고 새겨져 있다. 마을에는 큰 창고도 많다. 사과 창고다. 마을에서 직접 선별, 포장,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마을 뒷산은 7부 능선까지 개간하여 사과밭이 됐다. 진홍대(65) 이장은 “1960-70년대는 86호에 360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44호에 98명이 살고 있으며, 100%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면서 “소농(고령 어르신) 몇 집을 제외하고는 억대 소득을 올리는 전국 최고소득 농촌마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마을은 현재 3억 이상 고소득 농가가 2집, 1억 이상은 20가구가 넘으며, 마을 평균 소득이 1억 이상 된다고 알려져 있다.

▲ 마을의 상징
신홍열(66) 노인회 총무는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약 90만 상자 쯤 되며, 금액으로 환산하면 45억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진 이장은 “1970년부터 사과나무을 심기 시작하여 80년대부터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생산과 제값을 받게 된 것은 2000년 전후”라면서 “해발이 높고 일조량이 풍족해 전국 최고의 당도와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사리미 마을 사람들
전국 최고 소득 마을답게 마을의 각종 시설도 선진화 돼 있다. 경로당 회의실은 첨단 방송시설과 노래방 기기가 있고 PPT 등 교육시설도 완비했다.

진 이장은 “앞으로 컨트롤 리모컨 하나로 원거리에서도 방송할 수 있는 방송시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초입에 500년 수령의 동수나무가 있다. 마을을 지키는 동신(洞神)이기도 하다.

▲ 진홍섭 노인회장
▲ 정옥남 부녀회장

 

 

 

 

 

 

 

진경환(77) 어르신은 “매년 정월대보름날 자시(子時)에 뒷산 동바위(洞石)에 가서 산신제를 올리고 내려와 마을 동수나무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서낭제를 지낸다”고 했다.

정옥남(54) 부녀회장은 “우리마을 부녀회는 1988년 조직되어 28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며 “깨끗한 마을 가꾸기, 경로회 김치봉사, 폐비닐 및 농약병 수거, 건강촌 후원, 불우이웃돕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황종환 노인회부회장
▲ 권태옥 할머니
▲ 권분례 할머니

 

 

 

 

 

 

 

기자가 마을에 갔던 날 마을 어르신 십여 분이 경로당에 모여 점심을 함께했다. 꼬리곰탕에 잘 익은 김치 그리고 청국장과 돼지고기볶음. 도시지역에서 먹는 맛과는 확실히 다르다. ‘늘 이렇게 잘 해 드시냐?’고 물었더니 “동장님과 부녀회장님이 적극 지원해 주신다”며 “반찬은 없으나 많이 드시라”고 하면서 밥 한 그릇 더 주신다.

점심을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도 하고 사과 이야기도 나눴다. 권분례(80) 할머니는 “사과 한 개를 생산하기 위해 여덟 번 손길이 가야 한다”며 “맛있는 사과는 햇빛과 바람과 농부의 정성이 합해져서 만들어 진다”고 하면서 힘이 많이 든다는 뜻을 표했다.

▲ 안분희 할머니
▲ 이기순 할머니
▲ 진경환 어르신

 

 

 

 

 

 

 

권태옥(81) 할머니는 “예전에는 초가집에 보릿고개를 넘으며 어렵게 살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통일벼가 나와 10가마 먹던 논에서 50가마가 쏟아져 나오니 그 때서야 배고픔을 면하게 됐다”고 했다.

안분희(79) 할머니는 “사리미는 예전에 선비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고 전해 들었다. 50년 전 까지만 해도 골목에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면서 “지금은 교육열이 높은 마을로 선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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