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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90]단산면 단곡3리(두레골·웃질막)

‘금성대군당’과 ‘곽진의 묘’가 있는 단산면 단곡3리

2016. 01. 06 by 이원식 기자

▲ 웃질막 전경
황소 1마리 제물로 바치는 두레골 서낭제
소수서원장 지낸 곽 단곡 선생이 살던 마을

단산면 단곡3리 가는 길
단산면 단곡3리는 두레골에 금성대군당이 있고, 가장 숨쉬고 싶은 청정마을로 이름난 곳이다.

영주 서천교에서 귀내-장수고개-동촌-순흥-소수서원-선비촌을 지나 단산면 방향으로 간다. 청구리 삼막교차로에서 까치재(鵲峴)를 넘고 또 느티재(느티나무재)를 넘으면 단곡1리이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단곡천을 따라 국망봉 방향으로 1km 쯤 오르면 곽진 선비의 묘가 있는 단곡3리 웃질막이다. 마을 초입에 소나무 7그루가 몸을 낮추어 예를 표한다. 소나무 아래쪽에는 수백 년 수령의 동수나무가 바위 위에 앉아 있고 옆에 서낭당이 있다. 그 아래 계곡에는 곽 단곡 선생이 시와 풍류를 즐겼다는 단곡반석(丹谷盤石)이 있다. 반석을 지나 조금 올라가서 우측에 있는 골이 ‘서당골’이다. 단곡 선생이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두레골 서낭당은 여기서 2km 쯤 올라 계곡 동편에 자리 잡고 있다.

▲ 장안사
지난 20일 단곡3리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조규박 이장, 김태성 노인회장, 최원회 어르신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만나 두레골 이야기를 듣고 곽 단곡 선생의 흔적을 보고 왔다.

역사 기록으로 본 단곡리
단곡리 지역은 1414년(태종 14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 일부석리(一浮石里) 단곡방(丹谷坊) 지역이었다. [조선 영조 전에는 ‘리(里)와 방(坊)’이라 칭했고 영조 후에는 면(面)과 동(洞)으로 칭했다.

1849년 안정구가 편집한 자향지(순흥지)에 보면 「순흥부 일부석면에는 병산(甁山), 대지곡(大枝谷, 행갈부근), 서창(西倉), 회석(檜石), 단곡(丹谷) 안남동(安南洞), 성곡(聲谷, 소리실), 좌석(座石), 원통(元通), 삼가리(三街里), 마락리(馬落里) 등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웃질막 표석
그 후 고종33년(1896년) 전국을 8도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북도 순흥군 일부석면 단곡동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규박 이장은 “현재는 37호에 52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1960-70년대 화전민들이 많이 살 때는 110호에 700~800명이 사는 산촌마을이었다”고 말했다.

단곡의 지명 유래
단곡이란 지명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곽진(郭山+晉, 1568-1633)을 ‘곽 단곡 선생’이라 부른다. 그의 호가 단곡(丹谷)이기 때문이다. 곽진이 단곡에 살아 호를 단곡이라 했는지, 후일 그의 호를 따 단곡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통 자신이 살던 마을 이름을 호(號)로 썼던 예로 봤을 때 단곡이란 지명이 먼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산면’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 때 단곡의 곽진 선생과 병산(甁山, 바우)의 김구정(金九鼎) 선생의 마을이름을 따 단곡의 단(丹) 자와 병산의 산(山) 자를 조합하여 단산(丹山)이라 했다고 전한다.

▲ 단곡반석
또한 질막이란 지명은 진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진막(陳幕)은 군영(軍營)과 같은 뜻으로 군대가 주둔한 곳이란 뜻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단곡리(질막, 안남) 산줄기를 따라 고치령으로 올라가면 가장 높은 산이 옥대4리 앞에 있는 왕산”이라며 “당시 왕산에 성이 있었고 주변 골짝에 진막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영주의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한 사학자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부대가 481년 고치령을 너머 신라를 침공했을 때 고치령 남쪽 협곡에서 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다시피 퇴각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두레골 서낭제
금성대군당(이하 상당)이 있는 두레골은 아주 옛날부터 나무꾼이 다니는 길목에 산신각이 있어 오가는 초군들이 산신령께 기도하던 곳이다. 1900년대 초 죽동에 모셨던 금성대군 혈석을 이곳으로 이안(移安)하면서부터 초군청 주도로 매년 정월대보름날 서낭제를 올리게 됐다.

정월 14일 인시(3-5시) 초군청 좌상은 어른(희생 소)을 모시고 성화(聖火, 참기름 접시불)를 앞세워 두레골로 향한다. 제관들은 두레골 목욕소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재계한다.

먼동이 트는 시각 상당에 도착하여 잡신을 쫓고 향을 피운 후 한지를 접어 고깔을 만들어 신체(혈석)에 씌우고 실타래를 건다. 소를 잡는 ‘어른 지우기’와 희생물을 제단에 바치는 ‘제물 돋우기’를 준비한다. 통나무로 불을 피우고 숯불에 냄비밥을 지어 오시(11-13시)에 산신각에 새앙을 올리고 유시(17-19시)엔 상당에 새앙을 올린다. [새앙=냄비밥]

▲ 웃질막 서낭당
좌상은 희생(犧牲, 소 잡은 생고기)의 오른쪽 다리를 산신령께 바치고, 간과 지라는 옹가지에 담아 상당에 올린다. 모든 생고기는 일정한 부피로 나누어 묶어 상당 좌우 벽에 붙여 쌓아 진설한다. 소 한 마리 모두가 상당에 진설된다. 좌상과 제관들은 열나흘 달을 보며 달이 상당 앞 소나무 끝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자시(23-01)가 되자 헌관과 참제자들은 관수세수하고 의관정제한다. 희생 외 메와 전 등 제수(祭需)를 진설하고 나면 시각은 밤 12시에 이르고 제례가 시작된다. 삼상향과 참신에 이어 초헌례(좌상)를 올린 후 모두 부복하면 축관이 독축을 한다. 아헌례와 종헌례를 올리고 재배한 후 헌관과 참제자들은 국태민안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린다.

단곡 곽진 선생의 묘
웃질막 뒷산 중턱에 단곡 곽진(1568-1633) 선생의 묘가 있다. 김태성 노인회장의 안내로 다래덤불을 헤치고 묘를 찾았다. 오랜 풍화로 비문은 마모돼 보이지 않지만 상석과 비석은 당시모습 대로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비석은 묘 바로 앞에 있다. 사각 받침돌 위에 상석을 놓고 상석 위에 비석을 세웠다. 김 회장은 “단곡 선생의 제자들이 마을 앞 계곡의 돌을 다듬어 묘비를 세웠다”고 했다. 곽진은 당시 영남오현(五賢)의 한 분에 들 정도로 학문이 높고 몸가짐이 단정·근엄하여 원근에서 배우고자하는 사람이 많아 문도가 7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소수서원 원장(1608-1615)으로 추대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산실(散失)되었던 장서(藏書)를 되찾고, 서원 내에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고 한다. 현풍곽씨가 이곳(영주)에 정착한 것은 단곡의 아버지 생원 한(澣)때부터이다.

판관을 지낸 할아버지 자보(子保)가 처의 고향인 봉화현으로 와서 살다가 아버지가 풍기 고로촌(古老村)에 옮겼으며, 출세의 뜻이 없었던 선생은 소백산 아래 단곡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선생은 참 선비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단곡집(丹谷集)’에 남겼다.

▲ 웃질막 사람
두레골 장안사
두레골 서낭당 바로 위쪽에 2000년 창건된 ‘장안사’라는 절이 있다. 장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말사로 참선도량이다. 장안사 주지스님은 “장안사는 소백산의 정기를 오롯이 담은 절”이라며 “나를 찾는 참선 도량으로 수행을 위해 많은 불자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 조규박 이장
▲ 김태성 노인회장
▲ 최원회 어르신
주지 스님은 “장안사는 2016.1.11부터 ‘나를 찾는 공부’를 시작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외국인 템플스테이(산사체험) 도량으로 키워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웃질막 사람들
이 마을은 아직 산촌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옛 토담집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권도성(72) 어르신은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고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평생 해 온 일”이라며 “옛 방식 그대로 사는 게 가장 건강하게 사는 길”이라고 했다.

▲ 김형기 할머니
▲ 홍부전 할머니
▲ 박옥선 할머니
이날 오후 2시 마을회관에서 최원회(82) 원로 어르신을 비롯하여 박기연(85)·홍부전(83)·박옥선(80)·김형기(77)·권영옥(78)·이엄전(77)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빙 둘러 앉았다. 최원회 어르신은 “곽 단곡 선생은 명망 높은 선비요 유학자였는데 후손이 없고, 묘를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이 마을 양상모(68)씨는 “우리 마을은 축사나 돈사가 하나도 없는 청정마을”이라며 “수 년 전 한국의 청정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 권영옥 할머니
▲ 이엄전 할머니
▲ 권도성 어르신
박기연 할머니 등 여러 할머니들은 “두레골에서도 20리쯤 더 올라가서 나물을 뜯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예전에는 국망봉 아래 험천, 사모바우, 고두레골, 나무재기, 말구리 등 산골에 화전민 70여 가구가 살았었다. 1970년 대 고 박정희 대통령이 화전민 보호 정책을 펴 생활 정착금(도시이주 50만원, 관내농사 25만원)을 지원하여 잘 살게 했다(현재로 치면 5천만원)”고 말했다. 그들은 또 “당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을 때 통일벼가 나와 쌀이 쏟아지는 바람에 쌀밥 먹고 사는 시대를 맞이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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