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신 충절의 마을 ‘죽동(竹東)’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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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89]순흥면 지동2리(죽동마을)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신 충절의 마을 ‘죽동(竹東)’

2015. 12. 24 by 이원식 기자

▲ 죽동마을 전경
대군의 부인 ‘완산부부인 최씨’ 모시고 동제
지금은 벼농사·인삼재배로 과학영농 선도마을

순흥면 죽동 가는 길
죽동은 충절의 고장 순흥면 초입 우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죽계를 사이에 두고 피끝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한다. 귀내-장수고개-판타시온 앞을 지나 동촌고개를 넘으면 피끝마을이다. 동촌2리(조개섬) 회전교차로에서 순흥 방향으로 1km 가량 올라가면 도로 우측에 지동2리 표지판이 보이고, 우회전하여 지동교를 건너면 유서 깊은 죽동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가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고, 마을 앞 논 가운데에 죽동서낭당이 있다.

▲ 죽동 서낭당
지난 13일 죽동에 갔다. 김의식 이장, 이영호 노인회장, 안용모 어르신, 정란희 할머니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죽동의 유래와 부부인당 이야기를 듣고 왔다.

죽동의 역사
죽동지역은 1414년(태종 14)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도호부 대평리(大平里)에 속했다. 세조 4년 정축지변(1456년, 금성대군 사건)으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되어 풍기군으로 이속됐다가 숙종 10년(1683) 순흥부 복설로 환속됐다. 1849(헌종 15년)에 편집된 순흥지(자향지)에 보면 당시 대평면(大平面)에 있는 마을은 ‘아신(衙薪)[관아, 면사무소 인근], 성하리(城下里, 순흥초 부근), 사현정(四賢井), 석교(石橋), 산파(山坡)[산파단], 죽동(竹東), 묵동(墨洞), 태장(台庄), 한산동(漢山洞) 등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었다. 그 후 고종 때(1896년) 전국을 8도에서 13도로 개편하면서 경상북도 순흥군 대평면 지동리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 순흥면 지동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을 지동리(池洞里)라 한 것은 고려 때부터 있어 온 못골 못(池)의 역사성에 비추어 못 지(池)자를 써 ‘지동’이라 했다.

▲ 죽동경로당
죽동의 지명 유래
순흥지(順興誌)에는 죽동(竹東)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 죽(竹)자에 동녘 동(東)자를 써 ‘죽동’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현재 마을 사람들은 죽동(竹洞)으로 쓰고 있고, 최근에 발간된 영주시사에도 죽동(竹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도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우리의 고유문화(지명)를 말살하기 위해 죽동(竹東)을 죽동(竹洞)으로 창지개명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죽동은 대나무와 관련이 많은 마을이다. 국가지리원에 등재된 죽동의 유래는 「옛날에 대나무밭을 개척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이 있어 ‘죽동’이라 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흥의 원로들은 “비봉산 봉황이 죽실(竹實, 열매)을 먹고 살았는데 안으로는 내죽(內竹)의 죽실을 먹고, 밖으로는 죽동(竹東)의 죽실을 먹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이영호 노인회장은 “죽동은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며 “예전에는 집집마다 울타리가 모두 대나무였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그 흔적만 조금 남아 있다”고 말했다.

▲ 죽동 서낭당 옛터
옛 ‘죽동역’이 있던 마을
조선 때 이곳에 죽동역(竹東驛)이 있었다. 세조 3년(1457년) 전국에 538군데 역을 설치하고 이를 40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察訪, 종6품)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당시 순흥부에 속한 창락(昌樂)에 찰방이 근무하는 찰방역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큰 역이 죽동역이었다. 창락역에 속한 작은 역에는 ‘죽동(竹東), 창보(昌保, 창진), 옹천(瓮泉), 유동(幽洞), 통명(通明) 등 9개 역이 있었다. 죽동역은 순흥도호부로 오가는 마필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였다. 이 마을 안용모(79) 어르신은 “옛날 이 곳에 역이 있어 역촌 또는 역마라 불렀다”며 “역마를 관리하던 마방 터도 있었으나 지금은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금성대군의 혈석(血石)
죽동서낭당이 유명한 것은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셨기 때문이다. 두레골 상당(上堂, 금성대군당)의 유래는 단종복위 거사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 혈석(피묻은 돌)에서 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 어느 때 순흥 고을에 사는 권씨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묻은 혈석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이를 찾아 거두어 달라”고 하면서 돌의 모양도 알려 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죽동 냇가를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발견되었고, 이 혈석을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게 됐다.

그 후 순흥 사람들은 매년 정초가 되면 서낭당에서 신을 내려 농악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정성을 모으고 제수를 마련하여 대보름날 제사를 올렸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경 이 지역에 사는 이호인이라는 선비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이 곳에 일본인들이 와서 오줌을 누고 침을 뱉고 욕하니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 나를 조용하고 정갈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현몽했다. 그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국망봉 바로 밑 두레골로 옮겨서 모시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일을 주관한 사람들이 바로 상민(常民) 자치기구인 순흥초군청이었다.

▲ 정자나무
부부인당(府夫人堂)
죽동서낭당에는 ‘부부인당’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부부인’이란 왕비의 어머니나 대군의 아내에게 주던 정일품 칭호로 금성대군의 부인은 ‘완산부부인 전주최씨’다.

죽동서낭당은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신 후부터 정월대보름날 대군과 부부인의 신체를 서낭신으로 모시고 동제(洞祭)를 올렸다.

그러다가 금성대군의 혈석을 두레골로 옮겨가자 이곳에는 부부인 신체(神體)만 남게 됐다. 서낭당 안에는 암맷돌 1기가 부부인의 신체로 봉안되어 있다.

이 맷돌은 이번(2013) 서낭당 중수 때 땅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황병두 전 이장은 “동민들은 부부인을 서낭신으로 모시고 정월대보름 자시에 동제를 지낸다”며 “이곳이 충절의 명소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죽동마을 사람들

▲ 김의식 이장
▲ 이영호 노인회장
▲ 이순임 부녀회장
죽동에는 25가구에 50여명이 살고 있으며, 마을 앞에 5백 마지기가 넘는 넓은 들을 가진 풍요로운 농촌마을이다.

김의식 이장은 “죽동마을은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셨던 충절의 마을”이라며 “지금도 서낭당에 부부인을 모시고 정월대보름날 동제를 올린다. 제물은 삼실과와 흰떡, 생미역, 청어를 올리고, 제관은 헌관과 축관 등 10여명이 참례한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부터 경로당에 왔다는 장순금 할머니는 “경로당에 오면 서로서로 안부도 묻고, 건강도 챙기고 점심도 같이 먹고 내집같이 편하다”며 “이장님이며 부녀회장님이 따뜻하고 편안한 노인정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장순금 할머니
▲ 남진선 할머니
▲ 안용모 어르신
고향이 부석 갓띠인 정란희 할머니는 이야기 할머니처럼 말씀을 잘 하신다. “우리마을에는 인삼농사로 크게 성공한 집이 3집 있다”며 “모두 성실하게 일하고 연구를 많이 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정 할머니는 또 “정동윤 야구선수(18, 야탑고, 2016 SK 입단), 이정원(육상 100, 200) 육상선수, 김정훈 유도선수가 우리 마을 출신”이라며 “정동윤 선수는 지난 여름 아버지와 함께 마을에 와서 크게 잔치를 열었다”고 자랑했다.

김옥희 할머니는 “우리 손자 정원이가 소수중학교 때부터 육상선수였는데 지금은 안산시청에 있다”면서 “잘 해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따는 게 소원”이라며 손자를 자랑했다.

남지선 할머니도 “정훈이는 유도 선수인데 몸 건강히 다치지 말고 운동 잘 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 정란희 할머니
▲ 이인수 씨
▲ 황병두 전 이장
노인정에서 나와 마을 구경을 하다가 황병두 전 이장을 만났다. 황 전 이장의 안내로 마을 뒷산 서낭골로 가서 원래 서낭당이 있었다는 옛터를 둘러봤다.

이 마을 이인수(63)·정병례 부부는 한날한시에 한동네에서 태어나 결혼한 ‘천생연분 부부’로 알려져 있다. 이인수씨는 “1984년 영농자금 6백만원을 지원받아 땅 5마지기를 사서 인삼농사를 시작했다”며 “지금은 비가림인삼시범단지를 운영하는 인삼전문농가가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2008년 경북 농정대상을 수상하는 등 과학영농의 선구자이다.

이순임 부녀회장은 교회 봉사활동이 끝난 후 자택에서 만났다. 이 부녀회장은 “마을의 부녀회는 80세 할머니까지 모두가 부녀회원”이라며 “마을에 독신 어르신이 많아 노인정은 공동주거 형식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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