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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85]부석면 북지1리(갓띠 속두들)

봉황 날개 속에 평안한 마을, 부석면 ‘갓띠·속두들’

2015. 12. 03 by 이원식 기자

▲ 속두들 마을전경
청주정씨 집성촌, 선진된 교육열 교육에 주력
농부의 진실 담은 자연의 선물 ‘갓띠표 사과’

부석면 북지1리(갓띠·속두들) 가는 길
부석 사거리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2km 쯤 올라가면 콩세계과학관 표지판이 나온다. 이곳 북지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두봉교(마구령 가는 다리)를 건너지 말고 북지1리(속두들, 송고) 표석 방향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면 잘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탐방객을 맞이한다.

언덕빼기를 굽어 돌아 300여 m쯤 올라가면 느티나무 숲 속에 그림 같은 속두들 마을이 나타난다. 속두들에서 다시 계곡을 따라 500m 가량 더 올라가면 솔숲 언덕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갓띠 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 갓띠 표석
지난 15일 북지1리에 갔다. 골목 안쪽에 들어가 보니 선조들이 살던 토담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민속촌에 가도 볼 수 없는 귀한 주거문화가 남아 있어 ‘잘 보존해야 겠다’고 이장님께 말씀 드렸다. 김중년 이장은 “북지1리에는 속두들에 23가구, 갓띠에 54가구가 살고 있으며 사람 수는 모두 180명 ”이라며 “마을에는 100년 전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마을의 역사
조선 후기(1849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 보면 이 지역은 순흥도호부 삼부석면(三浮石面)에 속했다. 당시 삼부석면에는 임곡(林谷)[숲실]·대율곡(大栗谷)[한밤실]·방동(方洞)[방골, 부석사인근]·독유동(獨遊洞)·사문단(沙文丹)[사그랭이]·호문단(好文丹)·마흘천(馬屹川)[남대리]·의풍(義豊) 등이 있었다. 이 읍지에는 갓띠나 속두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북지1리 일대는 조선 후기 이후에 형성된 마을이 아닌지 추정해 보기도 했다.

그 후 1896년(고종33) 조선 8도제 23부에서 13도제로 개편될 때 경상북도 순흥군 봉양면(鳳陽面)이 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봉양면이라 한 것은 봉황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새 봉(鳳)자에 볕 양(陽)자를 써 ‘봉양면’이라 하였고, 나중에 북지리라 한 것은 마을 북쪽에 산이 있고 숲이 무성하다하여 ‘북지리(北枝里)’라 칭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지형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鳳凰山, 818m)을 멀리서 바라보면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형상이다. 봉황의 가슴 부위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있고, 갓띠·속두들은 오른쪽 날개 끝에 살짝 숨어 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고구려의 말발굽과 백제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평안한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평안한 마을이라 느껴진다.

▲ 속두들 표석
이곳은 마구령에서 갈곶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명당이다. 마을 뒤 갓봉을 주산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좌우에서 감싸고, 마을 앞에는 조그만 언덕이 있어 마을의 복운(福運)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다.

지명유래
부석면 북지1리는 갓띠와 속두들로 구성돼 있다. 산속에 꼭꼭 숨어 있어 도로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을 갓봉 또는 갓등이라 부른다. 갓봉의 모습이 갓을 닮았고 그 기슭에 마을이 띠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어 갓(冠)과 띠(帶)를 합성하여 ‘갓띠’라 하고 한자어로는 관대(冠帶)라고도 부른다.

아랫마을 속두들은 부석사와 지경을 이루고 있는 언덕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소나무 송(松)자를 써서 ‘송두들’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좋게 ‘속두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송두들에 한자어를 붙이니 소나무 송(松)자에 언덕고(皐)자를 써 송고(松皐)가 됐다고 한다.

청주정씨 집성촌
청주정씨 갓띠 입향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정운섭(73, 갓띠)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의 집 거실에는 약포선생 초상화와 친필 글씨 등이 걸려 있어 약포의 후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운섭 어르신은 “청주정씨가 갓띠에 들어왔을 때 이미 현풍곽씨가 살고 있었다”며 “청주정씨 갓띠 입향은 130년 전 쯤 된다”고 말했다.

▲ 속두들 마을회관
청주정씨가 처음 부석에 정착한 내력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15세손)선생의 맞며느리 하동정씨가 남편이 세상을 따나자 1600년 경 가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소천 두들마로 이거하여 세거지지를 마련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그의 후손 일부가 1880년 경 두들마에서 갓띠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1960년대에는 60여 호로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10여 호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정운섭·신현예(64) 부부는 약포 선생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고향을 지키면서 선비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내 고향 갓띠, 아름다운 마을
2014년 꽃피는 봄날. 갓띠 출향인들이 고향마을에 모여 제1회 갓띠축제를 열었다. 이날 갓띠 노인정 마당에 축제장을 마련하고, 출향인 120명과 마을사람(갓띠, 속두들) 80명 등 200명이 모여 옛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향을 자랑하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했다.

갓띠 축제를 주관했던 홍상진(부석사 가는길 팬션 대표)씨는 “갓띠 선조들은 선진된 교육열로 학교교육에 힘썼으며, 후손들은 재주가 뛰어나고 인물 좋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경향각지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며 “지난해 1회 갓띠축제를 열었고 향후 2년마다 축제를 열어 향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 갓띠 노인정
이 마을 출신 정경련(전 초등학교 교장)씨는 “나이 들수록 조상의 모습을 닮아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반가와 했고, 고향사랑 마음을 새롭게 했다”며 “내고향 갓띠는 참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회고했다.

부석사 사과의 대표 ‘갓띠표 사과’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사과를 ‘갓띠표 사과’라고 한다. 경북 최북단 해발 400m 이상 봉황산 산록에서 생산되는 갓띠표 사과는 풍부한 햇살과 높은 일교차, 갈곶산(토골)에서 발원한 맑은 물과 공기가 어우러져 당도 14부럭스 이상 야무지고 아삭한 사과를 생산한다.

김경자 부녀회장은 “갓디표 사과는 사과 특유의 새콤한 맛이 강해 한국 최고 사과로 평가 받고 있다”며 “서울 신세계 백화점 등 대형 백화점 직원이 현장을 방문하여 당도를 측정해 보고 구매해 간다”고 말했다.

▲ 고향 옛집
김중년 이장은 “전국에 소문난 부석사 사과가 바로 갓띠에서 생산된 사과”라며 “대부분 주문에 의한 택배판매하고 있으며 완벽한 저장 시설로 가을에서 다음해 여름까지 신선한 상품을 출하한다”고 말했다. 갓띠표 사과에 대한 문의는 김중년 이장(010-4805-6922), 김경자 부녀회장(011-9353-3723)에게로 연락하면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갓띠·속두들 사람들

▲ 이규 씨

▲ 박선옥 씨
▲ 신현예 씨

 

 

 

 

 

 

김찬규(77)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노인이 대접받고 사는 마을”이라며 “출향한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과 정성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노인회 총무 류재순(74)씨는 “우리마을은 노인과 젊은이가 반반 조화를 이루며 사는 마을로 100% 사과농사를 짓는다”고 하면서 “갓띠 사과는 농부의 진실이 담긴 자연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60여년 갓띠에 살았다는 김금례(80) 할머니는 “예전에 모두 살기 어려울 때도 이곳 사람들은 가난 없이 살았다”며 “선조들이 산을 잘 이용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고 자손들은 근면 성실하게 상부상조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김영자 속두들 노인회장

▲ 정운섭 어르신
▲ 류재순 노인회 총무

 

 

 

 

 

 

속두들 김영자(71)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이장님과 부녀회장이 폐품수집을 비롯한 각종 수익사업을 해서 경로잔치도 해 주고 효도관광도 보내줘서 나이 들어 호강하며 산다”고 말했다.

속두들 이규(69)씨는 “지금까지 지하수를 먹고 살았는데 김중년 이장이 앞장서서 상수도 공사를 추진하고 있어 2016년 후반쯤 되면 상수도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김금례 할머니
▲ 김경자 부녀회장
▲ 김찬규 노인회장

 

 

 

 

 

 

마을의 자랑을 묻자 박선옥(64)씨는 “작은 동네다보니 형님, 아우하면서 가족처럼 살고 있다”며 “1980년대 이후 부석사 사과가 유명해 지면서 소득도 늘어나고 잘사는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 김찬규 노인회장

▲ 김중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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