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참 아름다운 마을이름 휴천3동 ‘아치나리’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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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82]휴천3동 아치나리

참 아름다운 마을이름 휴천3동 ‘아치나리’

2015. 11. 10 by 이원식 기자

▲ 아치나리 전경
300년 전 의성김씨가 개척 세거한 마을
묵향을 남긴 선비, 석당 김종호의 고향

휴천3동 아치나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남산고개를 넘어 문수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농협퍼머스마켓에서 우회전해 적서교를 건너면 노벨리스코리아 영주공장을 만난다. 여기서 좌회전해 서천강변로를 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 한양조씨 재사 적벽재(赤璧齋) 표석이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도로우측에 소규모 공업지역이 나타난다. 혜성산업, KG청정무역, 한국가스 앞을 지나 우측으로 난 좁은 농로로 접어들면 금빛들길과 늙은 버드나무도 만난다. 100여m 들어가서 좌회전하면 계단식 논이 있고 골짝 안 쪽에 집들이 보인다. 여기가 아름다운 마을이름을 가진 ‘아치나리’이다. 마을은 소쿠리형으로 입구는 좁고 안은 넓다.

지난 22일부터 26일까지 ‘아치나리’와 ‘연동골’에 가서 김호영 통장, 김우영 주손, 이연화 부녀회장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과 석당 김종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연동골 전경
마을의 역사
‘아치나리’는 조선 영조(英祖) 이전에는 영천군(榮川郡) 적포리(赤布里) 아천방(鵝川坊)이라 부르다가 영조 후에는 영천군 적포면(赤布面) 아천동(鵝川洞)이라 불렀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천군 적포면 적서동과 권선면 본리 일부를 합하여 영주군 문수면 적서리로 개편하고 아치나리는 적서리에 편입됐다. 그 후 1980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영주시 휴천3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서(赤西)’라는 명칭은 옛날 탑거리 부근에 ‘적벽암(赤壁岩)’이란 붉은바위가 있었는데 적벽암의 적(赤)자를 따 서천을 경계로 동쪽은 적동, 서쪽은 적서라 하였다.

▲ 아치나리 골목길
아름다운 마을이름 ‘아치나리’
우리나라 마을이름 중 아름답고 애교스러운 마을이름으로 ‘아치나리’가 자주 거론된다.

아치나리는 한자로 ‘아천(鵝川)’이라 쓴다. 아(鵝)는 거위 아자이고, 천(川)은 내 천자로 ‘거위내’ 또는 거위가 노니는 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옛 우리말 문헌에 ‘아치’는 ‘작고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졌고 ‘나리’가 변하여 내(川)가 되었으니 아치나리는 ‘작고 아름다운 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마을초입 우측 산 중턱에 있는 아호정(鵝湖亭)은 의성김씨 아호 김결을 추모하는 정자로서 거위 아(鵝)자와 호수 호(湖)자를 쓰고 있으니 아치나리와 조화를 이룬다. ‘아치나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오랜 옛날 선조들이 사용한 순수한 우리말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말에 한자어를 붙여 아천(鵝川)이라 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아천경로당
의성김씨 아치나리 세거 내력
의성김씨 시조 김석(金錫)은 신라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이고,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의성김씨 아치나리 입향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아치나리 주손인 김우영 선생을 만나 족보를 찾아가며 내력을 알아봤다. 김우영 주손은 “의성김씨 영주 입향조는 성균관 진사를 지낸 김결(金潔, 명종 기미년생, 21세손)선조다. 안동 예안 둠버리(녹전면 신평리)에서 병자호란(1627년) 무렵 영주 성밑(구성)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4대에 걸쳐 살다가 김결 선조의 고손(高孫)인 광혁(光爀, 숙종 을미년생, 25세손) 선조가 1740년 경 아치나리로 살림을 나 마을을 개척했다”고 했다.

김 주손은 또 “입향조 광혁 선조는 풍수지리에 밝아 좋은 터를 잡으셨다”며 “선조께서는 이곳 산자락에 움막을 짓고 마을을 개척하셨으며, 근면검소하고 개척정신이 강하여 아들(聖洽, 26세) 대에는 주변의 토지를 모두 소유하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김 주손은 이어 “광혁 선조의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마을이 크게 번성하자 인근 골짝으로 살림을 나 작은 마을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연동골(蓮東谷)이라 부른다”고 했다. 지금은 아치나리에 일곱 집, 연동골에 열 서넛 집이 살고 있다.

▲ 아호정
아호정과 혼연정
아치나리에는 두 곳에 정자가 있다. 아호정(鵝湖亭)은 아치나리 마을 앞산 중턱에 있다.

영주문화원 기록에 보면 아호 김결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견디다 못해 낙향해 띠집(띠풀로 지붕을 이은집)의 정자로 건립했으나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90년 다시 건립했다고 기록했다. 이곳에 생원(生員) 김결(金潔, 성균관 진사)의 자서시가 있다.

혼연정(渾然亭)은 연동골 마을 가운데 있다. 통덕랑(通德郞) 혼연(渾然) 김재붕(金載鵬)의 유덕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했다고 적혀있다.

▲ 혼연정
묵향을 남긴 석당 김종호
아치나리 아랫마을 연동골에는 우리나라 5대 국필로 알려진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선생이 살던 마을이다. 석당은 조선 고종 때인 1901년 영주군 문수면 적서리 속칭 연동골에서 김재홍과 성주이씨 사이의 삼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석당은 소우 강벽원 선생의 문하에서 7여년간 글씨를 수학했고 한학은 대룡산 지암 황영조에게 수학했다. 석당은 석봉·왕희지의 초서, 구양순의 해서 등 여러 명필의 법첩으로 서예의 기초를 다져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각각의 서체에 두루 통달했다. 일제 때 조선총독이 명필 다섯 사람을 초대한 적이 있는데 석당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참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당은 1942년 한중일 서도전에서 특선에 뽑히기도 하였고 1970년 강릉 ‘율곡백일장’에서 한시부문의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석당은 서도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글씨를 요하는 사람에게는 술 한 잔에 글씨를 써 주는 등 글씨가 아니라 인정으로 서로 나누었다. 그는 많은 글씨를 썼지만 1977년 4월 영남일보가 주최하는 개인전을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것이 전부다. 석당은 1928년 금강산 유점사 무량수전(無量壽殿), 1944년 부석사 안양루(安養樓), 중국의 영봉정사(靈峯精舍), 일본의 진충사(盡忠祠) 현판을 쓰는 등 160점에 육박하는 작품을 남겼다. 석당은 1985년 9월 9일 타계하였으며 연동골에 묘소가 있다.

 

▲ 소남재(석당의 집)
아치나리 사람들
지난 23일 아치나리를 찾아 나섰다. 아천경로당 앞에 차를 세우고 고구마 추수가 한창인 김동조(67)·류분남 부부를 만나 농사 이야기를 듣고 석당 선생의 소남재(小南齋)를 둘러봤다. 석당 선생 뒷집에 살고 있는 권응희(87) 할머니께 “석당 선생께 글을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지요?”하고 물었더니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섬돌에는 신발이 가득했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김영원(58) 새마을지도자와 이연화(57) 부녀회장은 부부지간으로 마을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한다고 류분남 씨가 귀뜸해 줬다. 그들을 찾아 연동골 뒷산고개를 넘어 농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고추를 따고 있는 이명서(72)씨를 만났다. “올해는 고추값이 없어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다”고 하면서 “이 지역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주택 개보수도 안 된다”고 했다. 다시 길을 찾아 건너편 밭에서 가을걷이를 하고 있는 김영원·이연화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표정이 밝고 친절했다. 김영원 씨는 마을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고, 다음날 마을의 역사와 내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전화로 줬다.

24일에는 이 마을 출신 김동인(94) 원로 어르신을 영주동 자택에서 만났다. 자택에 계시면서도 넥타이 차림으로 손님을 맞아 예를 갖췄다. “아천에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마을”이라며 “자세한 내력은 김우영 주손이나 김동호 선생을 만나 보라”고 했다.

▲ 석당의 남긴 글씨
곧바로 영남서도원으로 가서 김동호(82) 선생을 만났다. 김동호 선생은 석당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영주의 서예가로 명성이 높다. 영주시는 2014년 6월 서천에 있는 육각정(삼판서고택 맞은편)에 ‘구강정(龜江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이 때 현판 글씨를 쓴 분이 김동호 선생이다. 선생께서는 족보를 펴 놓고 아치나리의 내력을 설명해 줬다.

25일은 날씨가 맑아 마을 전경 사진을 찍고 26일 오전에 김호영 통장을 만나기 위해 연동골로 다시 갔다. 아천경로당 옆 자택에서 사모님이 타 준 커피를 나누면서 가첩을 펴 놓고 아천 입향조에 대한 내력을 살펴보고 석당 선생의 생전 이야기도 들었다.

김 통장은 “아치나리(김결 선조) 후손 중에는 석당 선생과 같은 큰선비가 계셨고 김진영 전 영주시장(전 국회의원)과 같은 큰 인물이 배출됐으며, 각계각층 지도자 50여명을 배출한 마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우영 주손을 만나로 아치나리로 갔다. 김 주손은 “이 터가 광혁 선조께서 마을을 개척한 후 처음 기와집을 지었던 자리”라고 하면서 세보(世譜) 쪽수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의성김씨 영주 입향 내력과 아치나리를 개척하여 세거한 내력을 설명해 줬다.

[휴천3동 아치나리사람들]

▲ 이연화 부녀회장
▲ 김호영 통장

 

 

 

 

 

▲ 김동인 선생
▲ 김영원 새마을지도자

 

 

 

 

 

 

▲ 권응희 할머니
▲ 김우영 주손

 

 

 

 

 

 

▲ 이명서 씨
▲ 김동호 선생

 

 

 

 

 

 

▲ 류분남 씨
▲ 김동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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