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600년 전 한성판윤 정도복의 향리 ‘한성골’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81]이산면 원리 한성골

600년 전 한성판윤 정도복의 향리 ‘한성골’

2015. 10. 30 by 이원식 기자

▲ 한봉재(달봉재)
한성(漢城)서 온 선비가 살았다고 ‘한성골’
달성서씨 영주 입향조 돈암의 첫 은거지

이산면 한성골 가는 길
원당로 원마트 앞에서 철도건널목을 건너 원댕이고개를 넘는다. 서원로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용암교를 건너면 영주고등학교가 나온다. 용암대 마을 앞을 지나 원리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관음사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을 ‘돌다리골’이라 한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한성로를 따라 올라가면 한봉재(달봉재)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을 만난다. 여기가 유서 깊은 한성골이다.

두 줄기 야산 사이에 들(논밭)이 있고, 집들은 3-5채씩 띄엄띄엄 50여 채에100여명이 산다. 마을은 아랫마 중간마, 윗마로 이어져 신암리로 넘어가는 하고개(재이름)까지가 한성골이다. 지난 16일과 19일 한성골에 갔다. 벼를 베고 생강을 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가을 추수현장에서 권정우 이장, 유영하 노인회장, 함정자 부녀회장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 옛 한성동의 유래와 마을 이야기를 듣고 왔다.

▲ 한성동 유래비
한성골의 역사
한성골은 조선 때는 영천군 산이리(山伊里) 한성동방(漢城洞坊)이라고 불렀다. 영주지에 보면 「산이리의 속방(屬坊)은 산이방(山伊坊), 초곡방(草谷坊), 용암방(龍巖坊), 사동방(蛇洞坊), 한성동방(漢城洞坊), 저율곡방(猪栗谷坊), 율지방(栗枝坊)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조선 영조(英祖1724-1776) 이후에는 산이면 한성리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산이면과 어화면, 말암면을 통합하여 이산면이라 칭하고 한성리는 이산면 원리에 속하게 됐다. 이산면이라 한 것은 ‘이산서원’에서 유래했고, 월리(院里)라 한 것은 이산서원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서원(書院)의 원(院)자를 따서 원리(院里)라 했다. 옛 이산서원은 남간재 정상 우측 골짝에 있었다.

▲ 한성동 전경
한성동의 지명유래
한성(漢城)이란 서울의 옛 이름이다. 이 마을 이름이 한성동이 된 것은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주 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가 정운경(정도전의 아버지)이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도(道)를 전하라는 뜻으로 도전(道傳), 둘째는 도를 보존하라고 도존(道存), 셋째는 도를 회복하라고 도복(道復)이라 했다.

셋째 정도복은 형 정도전을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벼슬이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오늘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이다. 정도복이 벼슬을 마치고 향리에 내려와 어버이 묘소(이산면 신암리)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여년을 보내던 곳이 한성골이다. 당시 사람들은 한성부판윤 벼슬을 지낸 큰 선비가 살았다하여 ‘한성골(漢城谷)’ 또는 한성동(漢城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일봉 정(도복)선생 유허비
영주의 선비 정도복
정도복은 고려 충정왕 3년(1351년)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나이 16세 되던 해 양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그 때 큰형 정도전이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강학할 때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하게 됐다. 그 후 20세 때까지 성리학을 수학하여 진사시(進士試)에 올랐으며, 1385년(우왕11) 정몽주가 주관한 과거에 제11위로 입격했다.

그 후 1392년 형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태조 3년(1394년) 가정대부로 승진하여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좌윤 겸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이어 밀직제학을 거쳐 자헌대부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라 성균관대사성을 겸임 했으며, 태묘공신의 봉호를 받았다. 1398년 왕자 난 때 큰형 삼봉이 화를 입은 뒤 문하찬성사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이후 조정의 부름을 받아 태종 3년(1403)에 성주유학교수, 동왕 9년(1409) 8월에 인녕부사윤으로 부임했다. 그 뒤 향리 영주(한성골)로 물러나 어버이 묘소 인근에 집을 마련하고 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쓰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묘는 이산면 신암리에 있으며, 신도비는 한성골에 있다. 모현사(慕賢祠, 신암리)에서 향사(享祀)가 이어지고 있다.

▲ 한성경로당
산이석교(山伊石橋)의 전설
한성좌윤이던 일봉공(정도복)이 1395년 여름 고향을 방문해 보니 장마가 져서 농부들이 내(도랑)를 건너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어 장정들을 동원하여 다리를 놓게 했다.

이 다리는 길이가 18척(약 4.5m)으로 아무리 물이 불어도 건너다닐 수 있는 든든한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이 다리는 農橋(농다리)였다고 하며 지금은 전설만 있을 뿐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돌다리골’이란 지명이 지금도 구전되고 있다.[송지향의 영주영풍 향토지 기록]

▲ 노인정 건립 기념비
돈암 서한정이 잠시 은거한 곳
돈암(遯菴) 서한정(徐翰廷)은 달성서씨 영주 입향조이다. 그는 세종조에 진사가 돼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문과 응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47세 되던 해 계유정란(1453) 때 세조가 불의한 수단으로 보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대과 응시를 포기하고 낙향했다. 이후 가족들을 거느리고 고향 화원을 떠나 영주 한성동으로 은거했다. 이는 그의 부인 월성손씨가 한성동에 살던 일봉 정도복의 외손이었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돈암은 한성동에 2년 간 은거(隱居)하다가 단산면 등영마을로 이주했다. 관음사 맞은편 산자락에 돈암의 묘소를 수호하는 저존재(著存齋, 재사)가 있고 묘소는 재사에서 약 100여m 위쪽에 있다.

박병남 할머니의 현대사 100년
이 마을에 올해 96세이신 박병남(고령박씨) 할머니가 살고 있다. 부석 임곡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과 어문공부를 한 박 할머니는 17살(1937년) 때 한성골 봉화정씨 가문으로 출가해 왔다. 박 할머니는 “당시 시가와 친가 모두 학문을 중시하는 양반가문이었다”며 “시댁과 친정에서 사돈지(査頓紙)를 많이 썼다”고 했다.

▲ 정준 어르신
▲ 김병도 씨
할머니는 “일제말(1943) 대동아전쟁 때 남편이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러가 뉴니기아 전투에서 전사하여 둘째 아들(정준, 72)은 여섯 달 유복자”라고 했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야학을 열어 글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익히게 하였고, 신학문을 부녀자들에게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에 앞장섰다.

6.25가 일어나 인민군이 마을에 닥치자 부녀자들을 뒷산 서숙밭에 숨겨두었다가 인민군들 밥해 먹여 보낸 후 안전하게 마을로 데리고 오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쳤던 박 할머니는 1960년대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대학생 8명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대학교육을 시키는 등 격동의 현대사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여성 지도자였다.

한성골 사람들

▲ 권정우 이장
▲ 유영하 노인회장
한성골(16일)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정준(72)씨다. 봉화정씨 주부공파 22대손인 정씨는 어머니(박병남 할머니)를 모시고 가문을 지키며 살고 있다. 마을의 역사와 지명에 대해 친절히 안내해 주시고 예로 대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마당에서 고추를 다듬다 만난 김옥희(81) 할머니의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에도 감사드린다.

권정우(60) 원리 이장과 함정자(57) 부녀회장은 부부지간으로 마을을 위해 한성골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권 이장은 2010년 건립한 한성노인정 비문에서 “상경하애(上敬下愛)의 풍속이 이곳을 중심으로 열렬히 빛날 것이다”라고 쓰고 피물루 정자를 소개하면서 “선비는 재물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힘써야 한다”는 유교사상을 덧붙였다.

▲ 박병남 할머니
▲ 함정자 부녀회장
유영하 노인회장은 한봉재 산자락에 산다. 이날 트랙터로 벼베기를 하다 만난 유 회장은 기자에게 소주 한잔을 권하면서 “유서 깊고 인정 넘치는 한성골 자랑을 잘 써 달라”고 말했다.

봉화정씨 후손인 정수길(76) 어르신은 ‘일봉 선생의 신도비와 한성동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또한 돌다리골, 서당골, 굽배미, 하고개 등 지명유래도 들려줬다.

마을에는 생강추수가 한창이다. 김병도(여, 65)씨와 맹영옥(67)씨는 창넓은 모자를 쓰고 생강을 캐서 다듬는다. 두 분은 “생강과 방풍(풍 예방 약재) 재배를 했는데 풍년”이라며 “우리마을은 권정우 이장을 중심으로 합력하여 선진복합과학영농을 하는 동네다. 범죄 없는 마을이고, 인심 좋은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 정수길 어르신
▲ 김옥희 할머니
마을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는 이숙이 반장을 찾아 육계농장으로 갔다. 최첨단자동화 시설을 갖춘 계사(鷄舍)에는 6만 5천수의 병아리들이 “삐약”거린다. 이숙이 씨는 “튀김, 치킨, 삼계탕용 육계를 생산하는 전문 육계농장”이라며 “모든 시설이 자동화 되어 있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