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역사와 전통의 토반(土班)마을 ‘용암대’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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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79]하망동 용암대마을

역사와 전통의 토반(土班)마을 ‘용암대’

2015. 10. 16 by 이원식 기자

고려말 입향한 단양우씨 600년 세거마을
용암대의 전설, 인재양성 요람으로 변모

하망동 용암대 가는 길
영주시내 원당로에서 영주중학교 방향으로 남간재를 오르면 좌측에 남간서당이 있고, 우측에는 옛 이산서원의 터와 구서원(舊書院)마을이 있어 유서 깊은 길이다. 술바우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선영여고 앞에서 좌회전하면 영주고등학교가 보이는데 여기가 ‘용암대마을’이다. 영주고등학교는 회명산(晦明山) 중턱에 우뚝 서 있다. 학교에 연이어 산자락을 따라 돗밤실 방향으로 길쭉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용암대’이다.

▲ 거랫마

용암대는 하망동 9통 지역으로 원당로 번개시장에서 철도건널목을 건너 원데이(元塘)고개를 넘어 영주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는 길도 있다. 지난 3일 오후 용암대 육각정에서 우혜경 통장과 백남옥(83)·우명호(82) 어르신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 용암대의 역사와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용암대마을의 역사
용암대마을은 조선 태종(1413) 때 영천군 산이리(山伊里) 용암방(龍巖坊)이라 부르다가 영조(英祖1724-1776) 이후에는 산이면(山伊面) 용암리(龍巖里)라 했다. 영주지에 보면 「산이리의 속방(屬坊)은 산이방(山伊坊), 초곡방(草谷坊), 용암방(龍巖坊), 사동방(蛇洞坊), 한성동방(漢城洞坊), 저율곡방(猪栗谷坊), 율지방(栗枝坊)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용암방이 용암대마을 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주군 이산면 원리에 속했으며, ‘구서원 윗마을’이라 하여 "상구동(上舊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산면이라 한 것은 ‘이산서원’에서 유래했다.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영주시 하망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사람들

용암대 지명유래
마을 앞에는 용암천이 흐르고 앞산 머리에 집채만 한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용암대(龍巖臺)’라고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말에 단양우씨 일족이 이곳에 터전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 앞 산기슭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 ‘용바위’라 불렀다. 이 바위는 마치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꼬리는 남동쪽으로 길게 뻗치어 있다.그래서 용 용(龍)자에 바위 암(巖)자와 돈대 대(臺)자를 써서 ‘용암대’라 부르고 있다.

▲ 영주고

단양우씨 세거 600년
용암대에는 지금도 단양우씨들이 10여호 살고 있다. 단양우씨 종중에 따르면 “고려말(1392년 이전) 우숭려(禹崇呂) 선조가 마을을 개척하여 입향조가 됐다”면서 “600년 이상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묘소도 실전된 상태이며, 입향조의 생몰과 입향년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고 했다. 우숭려는 고려의 절신으로 역동 우탁의 현손이며, 상서 우성유의 아들로 자는 상률(尙律), 호는 수암(秀巖)이다. 고려가 망할 무렵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조선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우숭려는 안동 예안으로 낙남(落南)하였다가 옛 영천의 동쪽 용암대에 터를 잡았다. 당시 우거진 숲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용암서당을 지어 자제 교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수암정은 옛 서당을 보수하여 우승려의 호를 취해 ‘수암정’이라 하고 숭조지소로(崇祖之所)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부석 감곡, 문수 승문, 장수 성곡 등에 살고 있는 단양우씨들은 모두 우숭려의 후손들이다. 우병태(87, 31세손) 종손은 “영주의 토반(土班, 붙박이로 대물림해 온 양반)은 민우정”이라며 “여흥민씨는 문수 한쟁이에 살았고, 단양우씨는 용암대에, 봉화정씨는 한성골에 살았다. 이 세 마을이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토반마을”이라고 했다.

용암대의 전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났다. 당시 원병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남쪽으로 진군하여 내려오던 중 죽령에 이르러 남쪽 지형을 살펴보니 멀리 영천 고을에 서기(瑞氣)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을 찾았더니 바로 ‘용암대’였다. 풍수지리에 밝은 이여송이 용암대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니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려는 모습이었다.

이에 크게 놀란 이여송은 ‘이 바위를 그대로 두면 조선에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 하여 차고 있던 장검(長劍)을 뽑아 용의 머리를 내리쳐 잘라버렸다고 한다.

당시 이여송의 칼에 맞아 잘려진 용의 머리 부분 바위는 지금도 소나무 우거진 용암대 오른편 아래쪽에 뒹굴고 있다. 1972년 이 마을에 영주고등학교가 세워지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 내고 있으니, 400여 년 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선견지명은 가히 놀랄 만하다 하겠다.

인재양성의 요람 영주고(榮州高)
영주고등학교는 성실(成實), 절검(節儉), 청직(淸直)의 송암정신(松巖精神)을 바탕으로 도덕적이고 창조적인 인격을 도야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인재육성을 위하여 고 송암(松巖) 김두혁(金斗赫) 선생이 1972년 설립했다.

▲ 고목나무

김두혁 선생은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오면서 ‘인재양성’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회명산(晦明山, 어둠을 밝히는 산) 중턱에 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최근 영주고 출신이 3명이나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영주고에 따르면 “지난 2월 민정수석으로 발탁된 우병우 수석(9회)과 함께 총무비서관실 J행정관(6회)과 홍보수석실 K행정관 등 3명의 동문이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주고는 개교 이래 우병우 수석을 포함해 서울대에만 44명을 진학시킨 지역 명문고이다.

마을의 구성
마을 사람들 중에는 단양우씨 입향조인 우숭려가 마을에 처음 정착한 곳이 현 ‘송암정사 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우혜경 통장
▲ 우병태 단양우씨 종손

우혜경 통장은 “용암대마을은 육각정을 기준으로 거랫마와 안마로 구분되며, 거랫마에는 학교와 송암정사(松菴精舍), 수암정, 집들이 있고, 안마는 구 종택과 고목나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면서 “현재 50여호에 120여명이 살고 있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임병국(80) 어르신은 “예천임씨가 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단양우씨가 마을을 개척한 후 약 100년 뒤”라며 “지금은 5-6집만 산다”고 했다.

▲ 백남욱 어르신
▲ 우명호 어르신
수암정 옆에 사는 이홍련(67)씨는 “단양우씨 종중들은 훌륭한 선조를 모신다는 자부심과 숭모(崇慕)의 예가 각별하다”면서 “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는 수암정에서 많은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용암대마을 사람들
마을 앞 들은 예전에는 논이었으나 지금은 밭이나 대지(垈地)로 변했고, 도라지밭에서는 가을추수가 한창이다.

반장으로 마을일을 돕고 있는 김제희(62)씨는 “40년 전 이 마을에 왔을 때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며 “그러나 서로 돕고 정나누면서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고 말했다. 영주고 행정실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는 우명호(82) 어르신은 “영주고등학교를 설립한 고 김두혁 이사장은 ‘인재양성’에 뜻을 펼쳐, 국가적 인재를 많이 배출하는 명문고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활을 만드는 ‘궁장’인 권영덕(77) 어르신은 “우리 마을은 햇살 잘 들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며, 공기 좋은 땅”이라면서 “도시주변 전원마을로 딱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 임병국 어르신
▲ 곽태원 어르신
용암대에서 80년을 살았다는 백남옥(83) 어르신은 “40년 전 우리 마을은 초가집에 지게길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현대식 집에 넓은 길이 생겨 살기좋은 마을이 됐다”고 했다.

이 마을 곽태원(80) 어르신은 “용암대 용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며, 꼬리는 둘개비쪽으로 두고 있다”면서 “이 용은 암용이라서 앞산 묘소들은 모두 부인들 묘소만 있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살아 온 정정자(77)씨는 “새댁 시절에는 아궁이에 불때 밥하고 가마솥에 소죽 끊이고, 동네 우물가에서 물 길러다 살림했다”며 “지금은 나라가 발전해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 권영덕 어르신
▲ 정정자 할머니
▲ 이홍련씨
마을의 역사를 설명해 준 전영하(71)씨는 “어릴 적 용바위는 마을 서낭신이었다”며 “정월보름날이면 마을 어르신들이 용바위에 서낭제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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